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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님, 총무님, 우리들의 총무님_ 김한림
요약설명 : 한림은 설령 윤이 데모에 나선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신반대운동이라면 한림이 더 선배였다. 한림은 4·19혁명 후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윤보선의 아내 공덕귀 여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 쿠데타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으려 하자 한림은 윤보선을 설득해 한일회담반대투쟁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의 주도 인물이었던 장준하와 백기완 정도만 한림에 대해 아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림을 교사려니 생각했다. 한림은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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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남긴 투쟁의 기록
요약설명 :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량을 총결집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글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박용수 선생이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누비며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민통련이 만들어진 때부터였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민주화운동과 연을 맺었던 선생은 민통련 보도실장을 맡아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의 집회 현장을 뛰어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수많은 집회 때마다 무거운 사진기를 메고 현장을 누비던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박용수 선생이 기록한 사진에는 1980년대의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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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 안종필 이야기
요약설명 : 한글 전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 시대가 오면 국민이 골고루 출자해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그렇게 되면 편집권이 독립할 수 있을 것이다”던 그의 지론은 현실이 되어 그가 죽고 8년 뒤 국민주 모금으로 세운 언론사가 생겨나고 한글 전용 신문이 일반화되었다. 동아투위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87년부터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언론의 신장과 진실 보도에 탁월한 업적을 보인 이들’에게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여하고 있다. 지금도 언론의 민주화가 요청되는 현실에서 바른 언론 자유언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안종필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좌표이다. 박민나(자유기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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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앞에서, 재미교포 50명 개헌반대 데모
일자 : 1969.8.18
분류 : 분류없음 > 해외 및 북한
요약설명 : 투쟁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윽고 데모대열을 구호는 외치지 않았으나 한글 또는 영문 플래카드를 메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사관 쪽으로 행진했다. 다시 백악관 앞으로 자리를 옮겨 반 시간 동안 무언의 행진을 한 후 끝난 이 행사는 ‘3선개헌반대 재미한국인투쟁위원회’라는 이곳 교포 조직이 마련한 것이다. 대표자는 조지워싱턴 대학의 약리학 교수 김광서 박사다.『동아일보』 1969.8.19. 1면, 『한국일보』 1969.8.19. 2면고국의 동포에게우리 조국의 민주정치의 위기를 고해 주는 경종이 요란하게 울려 온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공화당의 3선개헌 공작은 우리나라 정계와 사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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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학원침투 간첩단’ 적발
일자 : 1975.11.22
분류 : 민주화운동 > 해외(일본)
요약설명 : 김일성주의 연구회를 오사카에서 조직, 모국 유학을 희망하는 교포 자녀에게 조국의 풍습과 한글을 가르친다는 구실로 씨알서당, 계성학원, 백두학원, 학습당 등 강습소와 사설 금융업체인 천리제일상사 등을 설치 운영하면서 이를 거점으로 공작원을 물색, 포섭하여 간첩 교육을 시킨 다음 유학생을 가장, 국내로 잠입시켰으며 이들에게 ▲ 유신 철폐, 구속자 석방, 언론자유 보장 등을 구실로 학생,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 등을 선동, 반정부 데모를 벌이도록 배후조종하고, ▲ 영향력 있는 학생, 종교인 등으로 하여금 민주화 투쟁, 구호 아래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반정부 통일전선 운동에 적극 참여토록 한 뒤 ▲ 4·19와 같은 극도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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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 가족·민주청년인권협의회, 주한미대사관 구내 카터방한 시위
일자 : 1979.6.11
분류 : 민주화운동 > 국제관계
요약설명 : 6월 11일 오후 3시 구속자 가족 9명과 민주청년인권협의회 회원 2명이 광화문 주한미대사관 앞뜰에서 영문과 한글로 플래카드를 들고 "카터방한 반대" "구속자 석방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국 대통령의 방한 반대시위를 벌였다 시위 현장에 미리 연락된 외신기자들이 시위를 취재했다. 미 대사관 측이 건물경계를 강화하고 한국경찰에 이들의 인도를 요청하여 시위자 전원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Ⅳ), 1987, 14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