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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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이유 및 답변서[전남대 함성지 사건]
등록번호 : 00836504
날짜 : 1974.02.28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전남대 함성지 사건의 피고인 이강 외 12명이 상고이유와 답변서를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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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이유서[피고인:박석무]
등록번호 : 00836517
날짜 : 1973.11.3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전남 함성지 사건으로 1973년 9월 25일 형을 선고 받은것에 대하여 항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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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이유서[피고인: 이강 외8명]
등록번호 : 00836528
날짜 : 1973.11.14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함성지를 인쇄하여 뿌리고 고발지를 작성한 사실을 인정하나 피고인들은 국가를...
영상사료 4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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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념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전사 시인 김남주
요약설명 : 함성》지를 제작하여 반독재 민주화의 선봉에 섰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울에 온 김남주는 지하신문 이름을 《고발》로 바꾸어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다 이듬해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진혼가 1〉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 데 가장 좋은 무기이다”〈진혼가 3〉와 같은 절창을 뽑아냈다. 1973년 12월 28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강과 함께 석방된 김남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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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사건-“산업화의 뒤안길, 도시빈민들의 처절한 투쟁”
요약설명 : 분할상환하게 할 것, 영세민 취로사업을 실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그 누구도 대책위원회의 요구에 답변을 주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모두가 감옥 아니면 벌금에 처해질 처지였다.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바꾸고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해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3. 최후 결단의 날 화요일인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성남출장소 뒷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몽둥이와 삽, 피켓 등을 들었고 가슴에는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는 노란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하나 같이 검고 메마른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