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콘텐츠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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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순한 인간과 포악한 청년 사이 - 항소이유서
요약설명 : 과정을 소개하면서 「문제 학생」의 「항소」에 귀 기울여 달라고 하고 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 vs 서울대 외부인 감금 사건 1983년 12월 21일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되었다. 대학에서 쫓겨난 학생 1,363명에 대한 복교 조치, 공안 관련자에 대한 특별사면, 해직교수의 복직 부분허용, 정치 활동 피규제자 다수에 대한 해금, 그리고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이 철수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1982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이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어 발본색원하겠다.”(1982년 10월 26일 안응모 당시 치안본부장의 국회 답변 등)라며 부정했던 대학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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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골을 깨운 「78 민중선언」
요약설명 : 나는 그 뒤의 상황은 몰라요. 내가 거기서 빠졌으니까. 내 역할은 거기까지 였지요. (고대학생운동Ⅱ 108~126쪽 발췌) ◯ 오상석 78년 9월 14일 데모는 이혜자, 천상만 두 선배와 나 이렇게 셋이 주동한 건데, 75년 이후 학내 시위가 전혀 없던 터에 큰 규모의 데모로 학내외에 크게 알려진 사건이 됐지요. 그날 나는 교양학부 도서관에서 유인물을 뿌린 다음에 서관으로 가서 학생들한테 유인물을 돌리면서 강당으로 모이라고 그랬는데, 서관 쪽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들이 보고 뛰어 들어서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갔지요. 끌고 가는 걸 학생들이 달려들어서 형사들을 혼내줘서 나는 일단 거기서 도망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손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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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를 농락한 3인방
요약설명 : 1978년 9월 13일 일어난 ‘서울대 3차 시위’는 그런 기류를 반영한 일격이었다. 3차 시위란 연초 김수천을 수장으로 하는 서울대 학생운동 언더그룹이 연중 네 차례 계획한 시위 가운데 세 번째라는 뜻이다. 경찰은 물론 학생들도 깜짝 놀랐다. 양민호가 준비한 이 시위에 도망자 성 욱과 이우재가 나타나 시위를 주동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행동강령이었다. “10월 17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위한 범시민학생 궐기대회를 갖는다.” 유신 선포 여섯 돌을 맞는 날을 기해 2차 광화문 시위를 예고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학내는 물론 장승배기, 노량진으로까지 번진 이날 시위로 80여 명이 연행되었는데 그...
구술 컬렉션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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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호
면담자 : 김종옥
일자/장소: 2007. 11. 16./구로동 사무실
요약설명 : 75년 서울대 학내운동 상황, 78년 서울대 학내집회와 1차 광화문연합시위, 78년 6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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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석
면담자 : 노기영
일자/장소: 2002.10.01. / 부산대학교 내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실
요약설명 : 도깨비집, 78년 7월 반유신페인팅 사건, 학내 운동권의 분위기, 10월 16일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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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
면담자 : 김종옥
일자/장소: 2007. 11. 14./노사정위원회 사무실
요약설명 : 고려대 학생운동 상황과 연합모임, 78년 고려대 9월13일 학내집회, 2차광화문시위...
일지사료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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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치소 수감 양심범들, 3·1절 기념 시위
일자 : 1978.3.1
분류 : 민주화운동 > 인권
요약설명 : 「78년 옥중 자유, 민주, 정의, 진리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양심범들은 유신체제 철폐,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성종대(성균관대) 등 2명이 추가 기소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328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Ⅴ), 1983, 328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Ⅴ), 1987, 1987쪽; 박찬웅, 『박정희·전두환의 난 9, 1978년』, 아우내, 1979, 56쪽;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328쪽.78년 옥중 자유, 민주, 정의, 진리 선언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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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생들, 「78 민중선언」 발표 후 반정부 시위
일자 : 1978.9.14
분류 : 민주화운동 > 학생
요약설명 : 강의실에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학생들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학생들은 「78 민중선언」을 낭독하고 가두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 및 무차별 폭행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교문 안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연좌시위를 벌이던 200여 명의 학생은 평소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던 정문 옆의 수위실까지 부수어 버렸다. 이후 학생과 경찰 간의 충돌이 시작되어 육박전이 발생했고, 오후 1시경 가 진압되면서, 총 52명이 연행되고 7명(이혜자, 천상만, 오상석, 김유수, 송영국, 금승기, 김기원)이 구속되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3,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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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생 1,000여명, 「6월 민족선언문」 낭독 후 시위
일자 : 1979.6.25
분류 : 민주화운동 > 학생
요약설명 : 년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고전태일 열사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78년 인분을 뒤집어쓴 동일방직 여공들의 울먹이는 한숨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월 삼만 원의 초기아적 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노동삼권을 국가보위법, 외국인투자기업체에 대한 임시특례법에 봉쇄당해 말을 할 수 없고 문어발 부실기업은 최근 은행대출이 막히자 소위 잠정적 조업단축으로 기업을 살린다는 미명하에 무작정 해고, 임금체불 등을 자행 노동청 공식 집계로만도 예년의 7배에 해당하는 노임체불사건을 빚는가하면, 날로 늘어가는 산업재해는 작년만도 무려 14만 명으로 이 중 98%가 시설미미, 공구저급, 감독소홀로 발생 노동현장의 비참함은 그 극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