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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희

구술자소개

구술자
유세희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이주실)
구술일자
2010년 8월 11일
장소
서울 역삼동 사무실
구술시간
2시간 5분 49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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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한 구술자 유세희는 4월혁명에 서울대 학생으로 참여했고 서울대 선언문을 작성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구술자의 종조부는 단주 유림(旦洲 柳林)으로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또 한민당 계열의 동아일보를 읽으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서울대 정치과 내의 신진회라는 써클에 들어가 활동했다. 신진회는 유근일의 필화사건으로  해체되었다가 후진국문제연구회로 개명된 다음에 4‧19 이후 다시 신진회가 되었고 4‧19 격문을 쓴 서정복이 멤버였다. 여기서  구술자는 후진국 문제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4월 21일로 대학연합시위를 계획하는 모임에 서울대 신진회 멤버들이 많이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구술자도 서울대의 선언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다. 
4월 21일로 예정되어 있던 대학연합시위가 19일로 앞당겨지자 선언문을 급하게 18일에 작성했다고 한다. 서울대의 경우 선언문과  행동대 등 시위 사전 계획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으며 18일 밤 선언문과 격문 등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선언문은 학보사  기자 출신 이수정과 서정복, 유세희가 만들었다.
선언문 작성 외에 행동대는 김광, 이장춘, 오등희, 양성철 등이 참여해 역할분담을 하여 타 대학들을 동참시키기로 하였다.
서정복이 쓴 격문을 황선필이 가리방에 밀어 19일 아침 교문 등에 붙이고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19일 아침 비교적 일찍 모여서 강의실과 도서관 등지에 있는 학생들을 모으러 다녔는데 그러느라 실제로 선언문을 낭독하거나 하는 장면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서울대 교문을 나설 때 학생 수는 약 2백 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가자마자 당시 법과대학 앞, 지금의 방송통신대학교 근처에서  시위대를 막는 경찰들의 구타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바로 주변 병원(서울대병원 아닌 일반 개인병원)으로 호송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대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경무대 앞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증언하지 못했다.
부상당한 채로 집에 있었기 때문에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서울대생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밖에 계엄군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반감이 비교적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5. 참고자료

4‧19혁명기념사업회(4‧19사랑방회 엮음), 『4‧19혁명사』, 2003
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
정창현, 「4월민중항쟁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1   
박현채, 「4‧19민주혁명과 이의 계승」, 『사상』 4, 사회과학원, 1990    
김행선, 「선언문과 구호로 보는 4‧19」, 『내일을 여는 역사』 23, 서해문집, 2006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유세희(서울지역대학생)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09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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