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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배
사업개요
- 민청학련 사건
-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이번 구술 채록은 1972년 고려대 ‘민우지 사건’, ‘민청학련 사건’, ‘자유언론실천운동’ 등 세 가지 주요 사건을 기록했다. 공간적 범위는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된 춘천, 대구, 광주 지역을 포괄하여 유신 체제 초기 저항 운동의 양상을 담아냈다. 사건 발생 후 50년이 경과하여 현존하는 문헌 자료가 극히 희소한 상황에서, 민청학련 시위 주도자 등 핵심 관계자들의 증언을 확보하여 사건의 실체에 실증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비록 시간 경과에 따른 기억의 한계라는 제약이 있으나, 당사자들의 풍부한 진술을 통해 사료적 공백을 메우고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을 역사화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현배
- 면담자
- 차성환
- 구술일자
- 2021.10.3.
- 구술장소
- 서울시 종로구 구술자 사무실
- 구술시간
- 396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서울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3 서울문리대 입학, 문리대 신문 ‘새세대’ 기자
1964 한일회담반대 시위 참여, 6·3관련 지명 수배, 군 입대
1967 복학, 6·8부정선거투쟁위원장, 중앙정보부 연행
1971-1973 대학원 진학, 명성여고, 중경고 교사, 상록학원 강사
1974-1978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 언도, 무기징역 확정, 수감생활 후 석방
1980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수석사무국장겸총무국장
1980.6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수배 중 자진 출두(3개월 가택연금)
1988 한겨레민주당 창당 주도, 서울 은평구을 총선 출마
1989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1993 ‘시민의 신문’ 창간 주도
2002 이후 한국윤활유공업협회 상근 부회장, (사)자원순환동그라미 대표 등
- 구술내용 요약
-
구술자는 1944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대전, 당진, 홍성 등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친은 수의사로서 공무원을 지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의 주장으로 이모 댁이 있는 서울로 가서 경복중학교에 입학했다. 경복고등학교 1학년 때 4·19혁명을 경험하였는데 4·19혁명 후 학교생활이 크게 바뀌었지만 5·16쿠데타가 나면서 모두 원위치되었다. 1963년에 서울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때 문리대에서는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결성되었고 5·16으로 감옥에 갔던 사람들이 복학하면서 학교 분위기는 해방구 같았다. 구술자는 문리대 신문《새세대》의 기자가 되었다.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반대투쟁은 김중태 등 민비연 멤버들이 중심이었지만 검거를 피해 부재한 탓에 구술자가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문리대생들이 단식농성을 할 때 김지하가 문화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서 유명해졌다. 6·3항쟁 때는 중앙청 앞까지 진출했으나 최루탄에 밀려 후퇴했다. 수배가 되어 피신 중 검사인 이모부의 주선으로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후 복학하여 6·8부정선거 규탄투쟁에 앞장섰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으나 기소되지는 않았다. 3선개헌반대투쟁 때는 투쟁을 해보기도 전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근 20일 간을 헌병부대에 갇혀 있었다.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명성여고, 중경고 등에서 교사를 했다. 서울문리대에서 10·2시위가 발생한 후 서중석을 만나면서 민청학련사건의 조직과정에 대한 정보를 듣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재야인사와 언론인을 만나 학생운동을 지원토록 요청하기도 했다. 긴급조치4호가 나오면서 구술자는 체포되었는데 송종의 검사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 민족지도부, 10인협의회 등으로 둔갑하면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김옥길 총장 등이 구명에 힘쓴 때문인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민청학련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조작된 인혁당 재건위의 김용원, 이수병 선생과 서울구치소 내에서 가까이 있어서 직간접으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구술자는 인혁당 재건위는 중앙정보부가 날조한 것으로 믿고 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대부분 1975년 2월에 석방되었으나 구술자는 반공법 경합 사건이 있다는 이유로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가서 1978년 8월까지 징역을 살았다. 석방 후 친구 회사에 취업하여 부산에 살면서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10·26사건이 나면서 1980년 봄에 복학하려 했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사무국장 겸 총무국장을 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재야의 결집체이기는 했으나 김대중 씨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기 위해 움직이는 통에 1980년 3월에서 5월까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구술자는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보고 김대중 씨의 정계은퇴선언을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5·17쿠데타가 나면서 피신하던 중 체포되었는데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구속은 면했다. 이후 친척 회사에 근무하거나 자신의 사업을 하던 중 6월항쟁이 일어나고 87년 대선을 경험하였다. 대선에서 후보단일화가 안 된 책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지만 김대중 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1988년 총선에는 한겨레민주당을 결성하여 참여하지만 1석도 당선되지 못해 해산되었다. 이후 생활정치를 시도하기도 하고 시민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반도중립화를추진하는사람’들을 운영하고 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인혁당재건위 인사들의 전격 사형집행과 이수병 선생의 환상을 본 상황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