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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해방 후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고, 찬탁과 반탁으로 극도로 대립하면서 통일을 위한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은 예고되었다. 남과 북 쌍방이 서로를 ‘괴뢰’라고 부르면서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끊잉없이 외쳤다.
북한도 소련과 중국에게 전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동의를 얻기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결국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은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선전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다.
그 동안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남한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대통령과 정부가 대전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를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여 6월 27일에 유엔군 파견을 결의하고, 즉각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는 역전된다. 파죽지세로 북진을 시작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24일에는 청천강을 넘어선다.
그러나 곧 이어 중공군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다시 후퇴는 시작되었다. 결국 이듬해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내주었다. 이후 한강을 전후한 지역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미국과 소련에서 내부적으로 논의되어오던 휴전 논의가 6월 23일 소련 대표 말리크의 휴전협상 제안으로 공식화되고, 7월부터 휴전협정이 개시된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은 휴전협상을 격렬히 반대했다. 이승만 정부도 미국의 사후 안전보장조치와 군사적 지원에 대한 보장이 없는 휴전협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미국을 압박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응이 소극적이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두어 미국을 압박한다.
그리하여 결국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의 체결을 약속하며 휴전협정에 조인하기에 이른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발발한 지 3년 1개월 만에 엄청난 인명피해와 물질적 피해만을 낳은 채 승자 없이 전쟁은 일단 휴전상태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