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5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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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열사 김세진-이재호 추모사업회
등록번호 : 00179234
날짜 : 1988.04.2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핵반대, 민족에게 통일을! -창립선언문 -김세진-이재호추모사업회 사업내용과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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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특집 분신자살학생김세진군 어머니 수기
등록번호 : 00182365
날짜 : 1986.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분신한 김세진 열사의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쓴 수기. 나 죽더라도 후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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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세진 열사 추도 예배-열사 영면 11주기를 맞이하여
등록번호 : 00844348
날짜 : 1997.05.0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1. 예배순서, 찬송가 2. 고 김세진 열사의 약력 3. 김세진 열사의 생전의 글 중에서
사진사료 7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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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세진, 이재호 열사 3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인파
등록번호 : 00749415
날짜 : 1989.04.28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분신한 '고 김세진, 이재호 열사 분신 3주기 추모 및 계승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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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이재호 추도식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유족
등록번호 : 00749416
날짜 : 1989.04.28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고 김세진, 이재호 열사 분신 3주기 추모 및 계승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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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사회연구소 창립총회에 참석한 고은 시인과 김세진 열사의 어머니
등록번호 : 00702312
날짜 : 1987.11.01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박물사료 2건
더 보기민주화운동사 컬렉션 1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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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포그 연기 자욱했던 오월 속으로_ 5.3인천민주항쟁
요약설명 : 있었다. 4월 28일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가 시위 중 분신을 한 사건을 두고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이었던 김대중이 과격한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고, 며칠 후 당시 야당인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가 전두환과의 소위 영수회담에서 일부 폭력 시위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합의를 하고 나자 야당과 재야는 완전히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달리는 기관차처럼 모든 것은 바야흐로 임계점에 이르고 있었고, 폭발 지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5월 3일 인천까지 왔다. 자옥이 도착하자 이미 인천시민회관 앞 주안사거리는 아침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8차선을 꽉 메운 인파 속에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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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를 기억하다
요약설명 : 살아서 싸우라는’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말씀을 학생들에게 전하려던 참이었다. 이재호 열사, 김세진 열사를 보낸 5월이었다.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진 이는 원예학과 1학년 이동수였다. 이동수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지만 최루가스가 난무하고 경찰이 교내에 상주하는 현실에 숨막혀했다. 그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치나 사회현실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말없이 들어주는 편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불의에는 굴복하지 않았고 폭압적인 시대의 요구에 맞섰다. 그가 군복무 중이던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군간부들은 야당을 찍은 '반란표'가 나오면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공언...
일지사료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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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김형욱·길재호·옥창호 등 젊은 장교들, 5개항의 정군 목표 수립
일자 : 1960.5.8
분류 : 경찰·군 개혁
요약설명 :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최준명 중령이 친분이 있는 조재미 준장의 협력을 얻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폭로되었다.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군은 참모총장 명령으로서 5월 9·10일 양일에 걸쳐 주모자로 지목된 김종필·김형욱·옥창호·석창희·최준명 등을 일시 구속했으나 곧 별다른 조치 없이 석방하였다. 한편 김종필 등이 석방된 후 곧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자진 사퇴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세진은 송요찬이 정군파 장교들을 처벌했을 때 발생할 더 큰 반발을 우려했을 것이며, 송요찬 스스로도 이승만정권의 부패에 적잖이 개입했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물러난 것으로 보았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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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기수별 대표단 16명, 최영희 연합참모총장에게 정군 주장하며 사퇴 요구
일자 : 1960.9.24
분류 : 경찰·군 개혁
요약설명 : 회부되었다. 이후 군기유해혐의로 다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7회에 걸친 재판을 받은 뒤 1960년 12월 12일 김동복 대령만 상관불경죄로 징역 3개월의 유죄판결을 받고, 다른 15명은 무죄 석방되었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서 김동복 대령이 제출한 탄원서에서 김종필·석정선·김형욱 등이 배후로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김종필과 석정선은 1961년 2월 4일 구속되었으며, 2월 8일 석방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혁명재판사』 1,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1962, 917쪽 ; 김세진, 「한국 군부의 성장과정과 5.16」, 『1960년대』, 거름, 1984, 132쪽 ; 『경향신문』 1960.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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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경, 6.21데모 관련자 900여 명 연행
일자 : 1965.6.22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정부·여당·군
요약설명 : 22일, 서울시경 산하 각 경찰서는 6.21시위 학생 중 대학생 664명, 고교생 201명, 민간인 41명 등 모두 906명을 연행, 그중 김근창(23. 서울공대 전자공학과 4), 민승(27. 건국대 정외과 4) 등 2명은 구속, 김세진(20. 건국대 정외과 2년) 등 대학생 16명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한편 31명은 불구속입건, 394명은 즉심에 돌리고 나머지 463명은 훈계 방면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