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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이 남긴 것들
요약설명 :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투쟁과 1965년의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및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한일협정비준무효화투쟁 등 회담의 전개과정에 따라 투쟁방향을 조금씩 달리하며 진행되었던 운동 전반을 일컫는다. 이는 5.16쿠데타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대해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국민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채 1965년 12월 28일을 기해 기어코 한일협정을 발효시킴으로써 을사늑약 60년 만에 다시 한일국교를 열었다. 그때 국민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굴욕적이고 저자세로 일관한 군사정권의 태도에 대한 강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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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로 보는 한일회담반대운동
요약설명 : "정부는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라. 이것이 관철 안 될 때 우리는 죽음으로 투쟁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한 후, 태극기를 펼쳐든 4명의 여학생을 앞세우고 교문을 나서 종로4가를 거쳐 시위에 나섰다. “그대를 기다렸노라”, “여야는 자숙하라”, “누구를 위한 회담인가”, “평화선을 고수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대'는 한일회담을 주도하고 일본에서 귀국한 김종필 공화당의장을 가리킨다. 누구를 위한 회담인가 1964년 3월 28일 성균관대 학생 시위 매국협정 저지시켜 조국수호 이룩하자 1964년 8월 14일, 한일협정비준안이 여당인 공화당의 단독 심의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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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 목사들, 성토대회 개최 및 성명서 발표
일자 : 1965.7.1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한일굴욕외교반대 투쟁을 결의한다. 당시 한국 교회의 입장은 한일국교정상화는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소액의 차관을 조건으로 일본의 만행을 다 눈감아야 한다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며, 특히 일제에 의해 신앙적 고난을 겪고 순교자를 낸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일 박정희의 삼선개헌 시도에 대해 1969년 9월 4일 한경직 목사는 조용기, 김장환, 김윤찬 등 242명의 한국개신교 지도자들과 “대한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을 내어 “개헌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한다며 3선개헌에 찬성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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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 장로회, 담화문 발표
일자 : 1965.7.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줄 알고 전국 교회 앞에 고하는 바이니 “우리 총회는 어떤 조건을 들어 정부와 대항하거나 조인무효화운동을 위해 극한투쟁이나 무저항투쟁을 하느니보다 전 교인이 합심 전력으로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실천되도록 기도주간을 우선 정하니 7월 5일부터 11일까지 1주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고 8, 9, 10일은 금식일로 정하니 이를 실천하여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속히 임하시기를 바라나이다”1965년 7월 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김 윤 찬『동아일보』 1965.7.7 석3면. 7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이 담화문의 발표경위가 교계에서 말썽이 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김윤찬 목사는 이 담화문을 동 교파 기관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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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문학인 82명, 한일협정비준반대 성명서 발표
일자 : 1965.7.9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투쟁하는 대열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 문학인들은 또한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정당한 의사발표를 정부는 탄압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한일협정반대 데모로 구속된 애국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동아일보』 1965.7.9 석3면, 『경향신문』 1965.7.9 석3면재경문학인 성명서1. 우리는 한일 국교의 정상화문제가 현실적 요청임을 인정하는 까닭에 과거 60년간의 잊을 수 없는 가지가지 구원을 억제하고 정부의 지금까지의 회담 추진을 주시하며 은인자중해왔다. 그러나 오늘 국민의 여론이 한일국교정상화의 원칙을 지지한다 하여도, 그것은 어떠한 굴욕적인 조건을 무릅쓰고라도 조기타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