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3건
더 보기사진사료 2건
더 보기영상사료 1건
더 보기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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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시위
요약설명 : ‘한일회담’ 조건으로 총 471건, ‘6·3’ 조건으로 총 219건이 검색되었다. 당시의 주요사료로는 6.3동지회가 생산한 <6.3 포럼 창간호> (등록번호 : 161613) 등으로, 문서사료는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사진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주로 경향신문사 생산사료들이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 전국적 반대 운동의 시발점이 된 6.3 운동 당시 모습> (등록번호 : 723198),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서울대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742493), <서울 시내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해가는 경찰들> (등록번호 :742418), <6.3 출옥 학생과의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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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
요약설명 : 전면 중지하라!> (등록번호 : 578372)가 있으며, 6.3동지회가 생산한 <6.3 포럼 창간호> (등록번호 : 161613) 등으로, 문서사료는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사진사료는 비교적 풍부하며 주로 경향신문사 생산사료들이다.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 전국적 반대 운동의 시발점이 된 6.3 운동 당시 모습> (등록번호 : 723198),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서울대학교 학생들> (등록번호 : 742493), <서울 시내에서 열린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연행해가는 경찰들> (등록번호 :742418), <6.3 출옥 학생과의 간담회 장면> (등록번호 : 723151) 등이 있다.
사료 콘텐츠 5건
더 보기구술 컬렉션 3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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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협
면담자 : 신재준
일자/장소: 2012.9.26./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협의 구술로 간략한 성장과정과 대학 입학 후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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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무
면담자 : 오제연
일자/장소: 2013.9.14./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이유, 한일협정반대운동 당시 한양대 상황과 6.3시위 주도, 6.3시위 후 체포, 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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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년
면담자 : 오제연
일자/장소: 2012.9.7./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구국투쟁위원회, 6.3항쟁, 경희대 6.4시위, 65년 4.12시위와 4.13시위, 80일간의 구속...
일지사료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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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6.3단체, 개헌반대 추진
일자 : 1969.2.5
분류 : 분류없음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재야의 정정법 해금자들의 대통령3선개헌반대에 나선 데 뒤이어 4.19와 6.3학생운동을 주동한 일부세력들이 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 이에 동참할 것을 선언하고 나섰다. 4.19와 6.3개헌반대투쟁위원회(가칭)는 5일 오전 시내 서린호텔에서 30여 명의 청년세력들에 의해 정식발기를 선언하고 공화당의 3선개헌저지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매일신문』 1969.2.6.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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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함성』지 사건 발생
일자 : 1973.3.30
분류 : 민주화운동 > 학생
요약설명 : 사건에 연루된 박석무는 6.3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 당시 전남대학의 중심인물이었고 그 후 광주지역 청년·학생운동 및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전남대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이강, 김정길, 김남주 등은 전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인물이었고 이 사건 이후 민청학련, 남민전 등의 사건에도 연루되어 젊은 나이를 감옥에서 지냈다. 이 사건은 고대 ‘검은10월단’ 사건이나 ‘『『고발』』지’ 사건과 마찬가지로, 1971년 10.15 조치로 각종 써클이 해체되고 학내 잡지가 폐간되며 대량 제적, 강제 입영이 이루어진 이후 학생운동의 공백기에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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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장관 “인혁당 관계자를 민주인사로 지칭하면 엄단”
일자 : 1975.2.24
분류 : 정치·국제관계 > 정부·여당
요약설명 : 후 월북했고, 그 뒤 김배영이 남파돼 활동하다가 또다시 월북했고, 1964년 이른바 6.3사태로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상황이 드러났으나 주모자인 김상한, 김배영 등이 월북했었기 때문에 당시 관련자들은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퍼뜨리며 경미한 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황장관은 “1967년 북괴간첩김배영이 재차 남파됐다가 검거돼 인혁당의 진상이 뒤늦게나마 입증되기는 했으나 이미 그때는 재판이 끝났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정부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1973년 10월 이후 학원소요사태와 유류파동으로 인한 경제불황 등으로 인심이 소란한 것을 틈타 개헌청원 서명운동 등으로 사회에 혼란을 불어넣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