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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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74회 3.1절에 청주산선 이장 발표
등록번호 : 00418068
날짜 : 1993.03.01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요약설명 : 당한 인사들을 즉시 석방하고 누구나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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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4월 월례회(74회)
등록번호 : 00449235
날짜 : 1999.04.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대구가톨릭노동사목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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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YMCA 시민논단-우리에게 있어서 미국은 누구인가?
등록번호 : 00878765
날짜 : 1988.06.2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5.18 기념재단
요약설명 : 장을병 교수의 '우리에게 있어서 미국은 누구인가?'라는 무료강연의 안내문 - 외세에...
사료 콘텐츠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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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_ 개발독재의 희생양에서 농민운동의 구심점으로
요약설명 : 단위 74개 농민회로 구성된 당당한 전국 조직, 7백만 농민을 대표하는 거대 단일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경선으로 치른 이날의 총회에서 의장에 권종대, 사무처장에 강기종이 선출되었다. 전농은 1990년대 들어와 우루과이라운드반대투쟁을 벌였고, 2000년대 들어와 수입쌀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전국 공무원 노동조합, 현대 중공업 노조 등과 함께 한미FTA반대운동을 벌였왔다. 이후, 전농은 민주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그 폭과 영향력을 증대시켜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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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 - 여공들, 민주주의의 봄을 부르다
요약설명 : 있었어요. 74년인가 75년인가 공치는 날이 한참 많을 때는 글쎄, 한 달 봉급이 1,575원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기숙사 밥값은 3천원이었거든요. 결국 마이너스 봉급을 받은 셈인데 그런 때는 시골에 가서 빚을 얻어와 생활을 했지요. 업주 장용호는 초창기에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미국의 백화점에 투자하거나 해운회사를 설립하는 데 흥청망청 써버린다.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자금운영을 하다가 상당한 은행 빚까지 진다. 게다가 1978년 석유파동으로 세계적 공황이 오자 노동자를 5백 명으로 감축해 버리더니 1979년 4월에는 일방적으로 폐업을 선언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거래은행인 조흥은행과 노동부를 찾아가 장용호가 미국으로...
구술 컬렉션 1건
더 보기일지사료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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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경찰서 앞에서 시위대에 실탄 발사, 사상자 발생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광주
요약설명 : 다른 기록에는 사상자의 명단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사망자 7명, 부상자 74명의 명단이 실려있다(김재희 편, 159-161쪽).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기록에는 경찰을 포함, 사망자 9명(총상 8명)의 명단과 『청춘의 혈』(김재희 현)에 나와 있는 부상자 명단을 인용하고 있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78-182쪽 ; 김재희편, 159-161쪽). 1960년 6월 3일 당시 재판공소장(광주지검 형 2031호)에 기록된 부상자는 모두 13명이다.광주 4·19 사망자 및 부상자 명단사망자 •고중석(남 16, 무직, 계림동 2구 28방) •김재복(남 18, 무직, 서동 1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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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시국수습협의회, 2단계 협상 개시
일자 : 1964.7.29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정부·여당·군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학교 측에 의해 데모에 관련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당한 학생수는 모두 230여 명인데, 그중 74명이 고교생이다. 한편 이 데모에 관련되어 징계를 당한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의 지명관 강사 1명이다. 지명관은 덕성여고 교장직과 서울대 문리대 강사직에서 해임되었다. 문교부는 29일 현재 법원 당국에 사건이 계류 중인 학생은 자연적으로 무기정학처분이 되어 사건이 끝나 유죄판결이 나면 퇴학, 무죄가 되면 복학처분이 된다고 밝혔다.29일, 비상계엄해제라는 제1단계 작업을 마친 여·야 시국수습협의회는 오후 3시부터 학원 및 언론대책의 입법여부, 공동선언 기초 등 시국수습을 위한 보다 높은 단계의 협의에 들어갔다. 7월 말까지 내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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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지령 받고 국가변란음모 지하조직”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 41명 구속
일자 : 1964.8.14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정부·여당·군
요약설명 : 『신동아』, 1985년 6월호, 336쪽)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하는 용공조작사건의 전형을 보여준 시초였다. 그러나 고문으로 조작된 조직사건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던 박 정권의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인혁당 사건의 망령은 10년 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중앙정보부 5국 대공과장이었던 이용택 중정 6국장의 손에 의해 또다시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부활하게 된다.『사료해제집 제1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74~75쪽. 이상우, 「민족일보·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 1985년 6월호, 333~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