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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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교회 그리고 세계-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70년사 증보자료집(1994.9~1999.7...
등록번호 : 00341383
날짜 : 1999.09.30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영등포산업선교회
요약설명 : 88선언10주년기념 선언문,12)나토군은 유고 폭격을 즉시중단해야 한다,13)NCCK-NC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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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제4기>제6차 중앙집행위원회(임시)
등록번호 : 00426085
날짜 : 1995.08.0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요약설명 : 8.15 민족공동행사 대표자회의 결과 8.15 민족공동행사 긴급대표자회의 결과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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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고하는 한민족의 양심선언 문서]
등록번호 : 00925177
날짜 : 2001.06.15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김근태재단
요약설명 : 2001년 6월 15일 통일광복민족회의에서 작성한 문서로 6.15 남북공동선언은 세계...
사료 콘텐츠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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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공동선언
요약설명 : 〈6․15 남북 공동 선언문〉 제2항에 녹여 합의에 이른 것이다. 두 정상이 발표한 〈6․15 남북 공동 선언문〉은 각본 없이 만나 극적으로 일구어낸 뜻밖의 풍작이었다. 장장 3시간 50분간의 긴 회담 끝에 합의에 도달한 문서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을 미래의 청사진이 들어 있었다. 3. 남북 공동선언 이후 의의, 그리고 달라진 것들 6․15 공동선언 이후 모든 것들이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해 8월과 11월, 12월에 각각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남과 북에 부모와 형제를 둔 혈육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해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갔다. 짧게는 15년, 길게는 43년까지 복역한 이들의 사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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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_ 1987년 직선제개헌쟁취의 불씨를 당기다
요약설명 : 인권단체, 외교협회뿐만 아니라 교회에 나가서도 연설했다.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무려 23일 동안 곡기를 끊은 김영삼은 위중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단식을 중단했다. 김영삼의 단식은 침체기에 빠진 한국의 민주화를 견인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숙명의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대중과 화합함으로써 야권은 물론이고 재야와 학생, 시민들 모두에게 큰 힘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은 1983년 8월 15일 8.15 공동성명을 통해 “5.18광주항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께 사죄드립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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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 -민주화를 향한 문인들의 기개
요약설명 :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단순위헌, 2010헌바70, 132, 170(병합), 2013. 3. 21.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는 헌법에 위반된다.] 1974년 11월 15일 고은·신경림·백낙청·염무웅·조태일·이문구·박태순·황석영 등은 모임을 갖고, 이러한 유신 독재치하에서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새로운 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11월 18일 세종로 시위 도중 선언문을 발표할 것을 결정했다. 염무웅이 작성한 이 선언문은 이틀만에 무려 101명의 서명을 받아내어 11월 18일 오전 10시 무렵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일지사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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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기본관계위원회 1차 회합
일자 : 1964.4.23
분류 : 한일협정추진 > 한·일
요약설명 : 세월이 경과했고, 한일회담의 양상이 그간 많이 변동하였으므로 이 시점에 있어서는 국회의 비준을 요하는 공동성명의 형식을 고려하고 있는바, 동 공동선언의 내용은 각 현안문제에 대한 구체적 규정보다도 양국의 기본관계 수립에 치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속개 제6차 한일회담 제1차 기본관계위원회 회의 회의록」, 1964.4.23., 『기본관계위원회, 1964』, 분류번호 723.1JA, 등록번호 756기본관계 문제에 관한 한일 양측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국 측 (1) 한국 측은 원칙적으로 기본관계 조약을 체결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 이에 있어서 양측 입장을 현실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서는 영토 조항을 “현재 행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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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32개 대학생 대표들,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 개최
일자 : 1964.5.25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73쪽. 이 선언문에서 제5항의 ‘친진보 반보수’라는 구절이 문제 되었는데, 그 부분은 삭제된 채 보도되었다. 제5항은 원래 “친진보 반보수의 거센 4·19, 3·24 열풍에”라는부분이 ‘국시’에 위반된다고 경찰에서 학생대표를 연행·조사하기도 하였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신동아』, 1985년 6월호, 309쪽)행동강령오늘 우리는 민족의 진보와 번영을 위한 혁명대열의 전위임을 재차 확인하면서 전국학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행동노선을 천명한다. 1. 오늘 우리의 총궐기는 백만 학도와 3천만 민족의 절실한 요구임을 확신한다. 1. 우리의 행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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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 대규모 시위, 고려대·서울대 등 약 3,000명
일자 : 1964.6.2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1시 50분쯤 종로3가에 약 300명당시 학생 수에 대해 300명(『동아일보』 1964.6.2 석3면), 150여 명(『경향신문』 1964.6.2 석7면), 500명(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87쪽)으로 다르게 쓰고 있음이 집결, 청계천2가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여 “박정희는 즉시 하야하고 여야 협조하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시위대 수가 차츰 불어나자 200명가량을 돌연 나타난 사복경찰들이 마구 잡아 차에 싣고 갔다. 이날 시위에서 경찰의 일제 반격전으로 김영모(경영 1년), 신정일(농경3년) 등 5~6명은 곤봉으로 머리 등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조완(16, 신설동) 군은 최루탄에 맞아 귀를 다치는 등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