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학생탑'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4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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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사료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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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숭고한 순교자의 고결한 피를 마시고 성장하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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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61540
날짜 : 1985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연세대학교
요약설명 : 내용과 전두환 정권 퇴진, 제적·제명 학생·교수 복학·복직, 4월의 탑 기공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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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스크랩]닫힌 눈으로 본 열리는 땅 이길주 기자의 북한 방문기18 - 사진으로 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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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79227
날짜 : 1989.07.09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김도현(3차)
요약설명 : 주체탑의 모습, 만경대 김일성 동상 주변을 청소하는 학생들의 모습, 평양 지하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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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료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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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 김영삼 고문 등이 2.28학생의거탑을 참배하고 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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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57012
날짜 : 1986.04.05
구분 : 사진필름류 > 필름
기증자 : 정태원
요약설명 : 등이 헌법개정추진위원회 대구경북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한 후 2.28학생의거탑을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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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색된 물을 시위학생들에게 분사하고 있는 광경-3.15의거탑 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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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577653
날짜 : 1960.04.12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3.15의거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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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3.15의거 기념상징조형물 제막식이 거행되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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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577976
날짜 : 1962.09.20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3.15의거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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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콘텐츠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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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언문으로 본 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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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1. 고려대 4.18 선언문 친필본 친애하는 고대학생 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고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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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청학련사건 - “사형선고를 받아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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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대학생들의 선도투쟁 이듬해인 1973년 10월 2일 오전, 서울대 문리대 교정은 평소와 달리 들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10시가 넘어가면서 교정 가운데 4.19탑 주변에는 삼삼오오 모여드는 학생들이 늘어나더니 오전 11시 경이 되자 6백 명을 넘어섰다. 마침내 한 학생이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전 국민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무언의 저항을 넘어서 분연히 일어섰다!” 유신쿠데타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였다. 또한 이후 다섯 달 동안 계속될 소요의 서곡이었다. 시위대에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학생들은 유신헌법 폐지, 정보정치 중단 등을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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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아카이브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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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사료 3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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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대, 경찰 저지망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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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단과대 학생들은 다시 열을 지어 종로2가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앞 인사동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처음으로 십여 발의 최루탄과 연막탄을 발사하면서 학생들의 전진을 완강히 제지하였다.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고 외쳤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27쪽. 조선일보는 이때 쏜 최루탄이 5발이라고 보도하였다. 경찰대는 최루탄 발사 후 극도로 흥분한 학생들에게 “광화문 쪽은 피하고 남대문로를 거쳐 의사당에 간다”는 쪽으로 협상을 제의하였다.이날 모든 시위대의 목적지는 국회의사당이었다(조화영 편, 90쪽).학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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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 연 사흘째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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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4.3.26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반대시위에 들어갔다. 역전을 거쳐 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는 등교하던 학생들이 합류, 9시 30분 현재 약 8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들은 도청 앞 광장에서 “선열들의 혼이 욕되지 않기 위해 대일굴욕회담을 적극 반대한다”는 요지의 호소문을 낭독하고, “매국외교의 주역 김종필을 즉시 소환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충장로로 행진했다. 이어 10시 45분쯤 광주제일고 1,500명도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합류, 11시 현재 도청 앞 광장에서는 조선대 학생 2,000여 명과 광주농고생 1,200여 명도 “대일굴욕외교반대”와 “이완용김종필을 지칭을 즉각 소환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데모를 했다. 전남상고생 1,000여 명은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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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문리대생 40여 명, 단식농성 3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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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4.6.1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20여 명은 사흘째인 1일 하오 3시 현재, 여전히 연좌데모를 벌이고 있다. 동교 교정에 있는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가마니, 거적을 깔고 머리엔 흰 광목을 동여매고 이틀 밤을 새운 학생들은 31일 낮 12시 45분에는 단식 24시간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반민주요소 소각식’을 거행했다. 단식대원들은 4·19 탑 앞에서 일제히 기립해 길이 1미터, 폭 30센티가량의 백지에 ‘사찰, 폭력, 사형, 기만’, ‘통일대책 없는 무능’, ‘소영웅적 민주정치’, ‘조국 없는 매판자본’, ‘주체 잃은 외세의존’, ‘무르익는 일본 예속’, ‘불온문서 연구서적’, ‘단1년만 기다려라’ 등 8개 항목을 써서 노끈에 나란히 매달아 식장에 걸어 놓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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