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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허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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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허종현
면담자
정호기, 양라윤
구술일자
2023.8.22.
구술장소
전주시 문화빌딩 휴스템코리아
구술시간
2시간 34분 43초

구술컬렉션 > 1970년대 민주화운동 > 유신 후기 지역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허종현은 1953년 3월 전북 전주시에서 출생했다. 전주에서 전주 북중과 신흥고를 졸업했다. 신흥고는 기독교 학교로 전통과 역사적 자부심이 강한 학교였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입문했고, 학교 교사들의 영향으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71년 3월 전북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2학년에 진급하면서 화학과를 선택했다. 당시 화학과는 산업화로 인해 관심이 높은 분야였는데, 적성에 잘 맞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시위에 참여했으나, 문제의식이 높지 않았다. 기독교인이어서 기독학생연합회에 가입했고, 거기에서 2년 선배 백남운과 이동명 등을 만났다. 이들은 은명기 목사의 교회에 다니면서 사회의식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1971년 하반기에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백남운과 이동명 등 선배들이 군대로 끌려가거나 제적되었다. 선배들은 1972년 허종현에게 전북대 KSCF의 활성화를 부탁했다. 그래서 지역 임원으로 서울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을 왕래했고, 지역에서 참여자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활동이 드러나면서 당국의 주시를 받았고, 중앙정보부 분소 등에 불려가 폭행당하거나 조사를 받았다. 1974년 4학년이 되어서는 KSCF를 이어갈 사람을 물색하고 책임을 맡기는 일도 추진했다. 민청학련 사건이 발발하자, 서빙고로 연행되어 조사받았으나, 구속은 면했다. 최인규 등을 중심으로 KSCF가 점차 활성화되었고, 후배들도 늘어났다. 1975년 전북대를 졸업하고, KSCF 선배들의 추천을 받아 성미가엘신학원 신학교육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입학하고 곧 전주로 내려와 군 복무를 했다. 이 기간에 후배들과 만나 모임과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전북에서 민주화운동이 조직적으로 가능했던 구심은 사실상 KSCF뿐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등장한 그룹들은 BK라고 불렸다. 1979년 충북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대전, 전주, 청주 등으로 발령을 받았다. 1981년 성공회 신부로 처음 부임한 지역은 전주였다. 전주에서 목회하는 동안 전북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특히 1984년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설립과 운영에 참여했다. 학생운동 노선과 성향이 다양해지면서 선배 그룹과 관계가 애매해지는 시점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1985년 충북 음성군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6․10민주항쟁을 비롯해 여러 활동을 했다. 1980년 후반부터 대전, 서울, 청주 등지에서 근무하다 전주로 귀향했다.

구술내용 요약

- 전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 가족관계와 성자

- 신흥고의 분위기, 신흥고의 분위기와 정서적 특성

- 1971년 전북대 화학과 입학, 1971년 전북대 학생운동의 주역들

- KSCF 활성화에 전력, 전북대 학생운동과 종교, KSCF 교육과 임원, 활동, 전북 KSCF의 중심 활동가

-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되어 조사받았으나 구속은 피함

- KSCF 지도교수 이석영, KSCF와 민청학련, 성공회대로 진학한 이유, KSCF와의 인연

- 1970년대 후반기 전북대 학생운동

- 1970년대 후반 전북 KSCF 주요 인물

- 전북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 1979년 충북에서 목회 활동

- 1981년 전주의 성공회 신부로 부임

- 1984년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전북민협) 창립

- 1985년 충북 음성군 성당에 부임

- 1980년대 후반부터 대전, 서울, 청주 등지에서 근무하다 전주에 귀향

- 구술면담에 대한 평가와 소회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1970년대 후반 전북 KSCF 주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