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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이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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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영복
면담자
정호기
구술일자
2024.7.17.
구술장소
구술자 자택
구술시간
3시간 4분 2초

구술컬렉션 > 1970년대 민주화운동 > 유신 후기와 80년대 전반기 지역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이영복은 1960년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시)에서 출생했다. 1979년 광주 대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사범대 사회계열에 진학했다. 입학 동기인 이상헌, 정선원과 교류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79년 5월 1학년 서클 모임인 ‘곰나루’를 결성했다. 1979년 10월 ‘유신철폐’ 벽서 작업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학사 징계를 받았지만, 10‧26사건으로 곧바로 복학했다. 12월부터는 이상헌, 정선원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학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선배들로부터 지도받았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서는 공주사범대 학원자율화운동과 총학생회 선거 등을 지원하고, 4〜5월 교내 집회 및 시위 등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6일부터 한 달여간 도피 생활하다가 대전시의 보안대에서 조사받았고, 훈방 이후에는 제32사단에서 순화교육을 받았다. 1980년 2학기부터 공식적으로 해산된 ‘금강회’가 언더 서클로 전환해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981년 경찰 당국은 ‘금강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관련 학생들을 연행, 조사했다. 이영복은 8월 8일 체포되었고, 충남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47일간 조사를 받으며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리고 징역 3년을 받고 대전교도소와 목포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83년 8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해 12월 제적생 복학 조치가 있었지만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로 상경해 노동야학에 참여했으나,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노동야학이 해체되었다. 이때 선배들의 권유를 받아 대전으로 내려와서 충남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합류해 활동했다. 1986년 4월 19일 신민당 개헌현판식 투쟁과 5‧17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 수감되었다. 1987년 5월 말 춘천교도소에서 출소한 직후 6‧10민주항쟁을 맞았는데, 광주시와 대전시에서 시민으로서 시위 대열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다. 이후 공주지역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활동했고, 1993년까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구술내용 요약

- 광주시에서 출생과 가족관계

- 대가족 생활과 중앙초등학교 진학

- 대동고등학교 교육 환경과 공주사범대 진학 계기

- 1979년 공주사범대 여러 인물과의 만남

- ‘곰나루’ 결성과 ‘유신철폐’ 벽서사건

-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의 공주사범대

- 시국성토대회 개최

- 보안대 조사 및 순화교육

- 1980년 2학기부터 금강회 언더서클 활동

- ‘금강회’ 사건 경위와 관련자들

- 부여경찰서와 충남 대공분실에서 고문

- 이적단체로 ‘금강회’ 사건 조작

- 대전교도소와 목포교도소 수감생활

- 목포교도소에서 출소

- 최연진에 대한 기억

- 이후 동료들의 활동과 ‘금강회’ 사건 재심 청구

- 서울시 구로동에서 야학 활동과 충남민청 활동

- 4‧19 개헌현판식 투쟁과 5‧17 시위로 구속

- 시민대열에서 참여한 6‧10민주항쟁과 현장 투신에 대한 고민

- 1993년 활동 중단과 2003년 활동 복귀

- 동료들의 소식과 삶에 대한 회고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금강회 사건으로 충남 대공분실에서 겪은 고문과 조사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