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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규

구술자소개

구술자
이완규
면담자
정호기, 양라윤
구술일자
2023.7.5.
장소
대전 시청자미디어센터
구술시간
3시간 23분 46초
구술아카이브 > 1970년대 민주화운동 > 유신 후기 지역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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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이완규는 1954년 1월 대전시 중구 대흥동에서 출생했다. 거주지 골목에는 또래의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이 여럿이었다. 경제적인 형편상 공업계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충남대 공과대학 기계과에 입학했다. 대학도 생활비를 벌며 공부해야 해서 학생운동에 긴밀하게 결합하지 못했다. 직접 관련한 사건은 1974년 10월 14일 충남대 시위를 구상하고 사용할 유인물의 제작이었다. 학교는 다음 날 휴교령을 내렸고, 11월 25일 개강했다. 두 번째는 1975년 3월 검은 리본 패용 사건이었다. 학교가 죽었다는 의미로 벌인 일종의 시위였다. 이 일로 인해 학장의 자택에 보호조치를 받기도 했으나, 도망쳤다. 그 외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세 번째는 1975년 5월에 발생한 서신 검열로 긴급조치 9호 위반을 적용받았다. 학교에서는 바로 제적 처분이 내려졌고, 7월 16일 재판을 받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폭행을 당해 지금도 후유증이 남았다. 학생 신분이 사라지자 바로 영장이 나와서 우여곡절 끝에 군 복무를 했다. 병역을 마친 후, 강구철, 오원진, 이범구, 우영재, 심재철, 김필중 등과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8년 11월 청람회가 조직되었다. 1979년 11월 29일 충남대 ‘시국선언문’ 배포 사건에도 관여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는 충남대 총학생회 선거와 시위 등에 관여해 도피 생활을 했다. 청람회는 1981년에 조직 사건화되었다. 이완규도 구속되어 1982년 9월 23일 유죄판결을 받았고, 1983년 8월 13일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5년 3월 결성된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창립에 참여하는 등 지역 민주화운동에 결합했다.


- 충남 대전의 한학자 집안에서 독자로 출생, 대전 대흥동 거주지에 또래의 민주화운동 관련자가 다수 거주

- 충남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충남대 산업기계공학과 1회로 입학

- 1973년 충남대에 입학해서 같은 골목에 살던 맹인호를 만남

- 집안 형편상 생활비를 마련하며 대학 생활, 1974년 10월 14일 충남대 시위와 관련자들

-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대학생들의 사랑방, 1975년 3월 검은 리본 사건

- 1975년 5월 서신 검열로 긴급조치 제9호 위반 구속, 1975년 7월 16일 집행유예로 석방

- 1980년 5월 직후의 도피 상황, 1975년 11월 긴급조치 제9호 위반자 3명이 입영

- 군 복무 후, 본격적인 사회과학 공부

- 민주화운동에 관한 전국의 소식 수집

- 1970년대 후반, 충남대 학생운동의 중요 인물

- 민주화운동을 위한 자기 관리

- 1979년 11월 29일 충남대 도서관 시국선언문 낭독 사건

- 1980년 5월 국면의 민주화운동과 탄압

- 1981년 한울회 사건, 1980년 5월 1일 충남대 시위

-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 유인물 배포, 1983년 8월 석방, 사회안전법

- 1985년 2월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출범

- 6‧10민주항쟁 이후의 민주화운동

- 정치권과의 인연, 결혼과 문익환 목사

-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23_유신 후반기 민주화운동_구술자료 상세목록_이완규.pdf 13716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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