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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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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홍갑기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8월 20일
구술장소
전남대학교5‧18연구소 , 2010년 8월 23일
구술시간
57분 14초, 1시간 54분 11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0년 출생 1960년 당시 광주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4월혁명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홍갑기는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 출신으로 1940년생이다. 1960년 당시 구술자는 광주고등학교(광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구술자는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세를 민감하게 주시하면서 친구 최수철, 박청명 등과 함께 야당집회에 참석해 박순천,  윤보선, 장면 등 주요 정치 인사들의 연설을 빠지지 않고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정보경찰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요시찰  대상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게 되었다고 한다.
3‧15 부정선거 이후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가 일어나고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4월 17일 구술자는 주변 친구들과  함께 시위를 계획하게 된다. 17일 친구 김동운, 최수철, 박청명 등과 함께 시위를 모의하게 위해 구술자의 집으로 갔는데, 눈치를  챈 누나가 구술자를 말리면서 17일 시위 계획이 무산되게 된다. 
하지만 18일 고려대학교 피습사건이 알려지면서 구술자는 친구 이홍길과 바로 다음날 시위를 계획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함께 이홍길의  하숙방에 모이게 된다. 당시 12명의 학생들이 이홍길의 하숙방에 모였는데, 구술자, 이홍길을 포함하여 김병욱, 조병수, 신강식,  김동운, 김선담, 박화부, 하성수, 김충언, 지부일 그리고 조대부고생 전만길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하면서 시위계획을  세웠는데, 구술자는 다른 학생들을 시위에 동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누출되면서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이 등굣길에 한 명씩 교장실로 불려가게 된다. 교장실에 모인 학생들 사이에서 시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사이 시위에 동참하고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게 된다. 이에 교장실에 감금되었던  학생들은 유리창 문을 열고 나와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고 여세를 몰아 교문을 막고 있던 교사와 경찰을 밀쳐내고 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광고생들은 교문을 나오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홍갑기는 중앙초등학교에서 법원거리 쪽으로 진입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붙잡혀 충장로파출소로 연행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곧 풀려났고 학교로 돌아오게 됐는데, 교장이 시위에 합류했던 학생들을  모아 놓고 크게 나무랬다고 한다. 
구술자는 오후4시경 학교를 나왔지만 당시 시위대의 행동이 과격하고 폭력화되는 것을 보고 여기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계엄령이  내려진 사실을 듣고 바로 해남 누나네 집으로 내려갔다가 이승만의 하야소식을 듣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구술자는 이후 전남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한일회담 반대 시위 등에 참여하여 7년 간 지명수배를 받고 어렵게 생활하다가 1968년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하였고,  2002년 교장으로 퇴임하였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1, 도서출판 심미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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