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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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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정우화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7월 3일
구술장소
광주 4‧19민주혁명기념관
구술시간
2시간 19분 6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3년 출생 1960년 당시 광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4월혁명 시위 참여, 부상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정우화는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출신으로 1943년생이다. 1960년 당시 구술자는 광주농업고등학교(농고)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구술자는 이승만 정권의 3선개헌, 부정선거 등의 소식을 접하면서 분개하였고, 학생으로서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당시 정세를 민감하게 주시하였다고 한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피습사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국적인 시위 열기  속에서, 같은 학교 3학년 선배 정대연에게 19일 농고생들의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19일 2교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농고생들이 교정을 나오게 되는데, 일부 학생들은 교사들의 제지를 받기도 하였으나 구술자는  별다른 제지 없이 시위에 합류하게 된다. 시위대는 광주일고를 지나 충장로5가 사거리에 도착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시위대의 숫자가  적은데다 경찰들의 바리케이드에 막혀 더 이상 시위를 진행하지 못하고 근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1시 30분경 시위대 함성소리를 듣고 구술자는 바로 집에서 나와 구광주역에서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다. 시위대는 역전파출소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최루탄이 발포되어 후퇴했다가 다시 재집결하여 양동파출소, 방림동파출소 등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시위를  전개한다.
7시가 넘어서 시위대는 학동파출소에 진격하는데, 이때 모인 군중이 약 2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학동파출소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공격하자, 경찰서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고, 이때 구술자 바로 옆에 있던 강정섭군이 사망하게  된다. 희생자가 발생하자 시위대의 열기는 더욱 높아갔고 학동파출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8시가 넘어 시위대들이 중앙경찰서 쪽으로 모두 집결하였는데, 구술자는 시위대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자 참여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시위대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의 발포가 있었고 시위대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정우화도 대퇴부에 총상을 당하게  된다. 총상을 당한 구술자는 제일성결교회 벽돌담을 넘어 몸을 숨겼고 제일성결교회 집사와 거기에 숨어있던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튿날 사촌형님이 운영하는 피부과에 연락해 재가치료를 받으면서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듣고 사촌형님이 4‧19 부상자로 신고해 육군77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받게 된다. 
구술자는 전남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한일회담 반대 시위, 월남파병 반대 시위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현재 4‧19민주혁명회광주전라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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