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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보

구술자소개

구술자
심영보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이주실)
구술일자
2010년 7월 23일
장소
서울대 의대 동창회관
구술시간
1시간 33분 12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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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심영보는 서울 마포구에서 출생하여 청파초등학교, 서울사대부속중학교,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에 서울대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심영보는 4월혁명 당시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으로 부상자 구호활동을 했다. 
당시 서울대 의대 분위기는 사회 참여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구술자의 표현으로는 100 중에 99가 돌아서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의 4월혁명 참여는 사전에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4월 19일 아침에 서울지역 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하고 있던 중에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실려 오는 것을 보고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모여 시위 참여를 하게 되었다.
시위 참여를 위해 학생회의를 했는데 4학년 박승균이 리드를 했고 당시 학생회장은 신유철이었다. 
붕대와 들것 등의 응급장치 등을 챙긴 뒤 병원 문을 나와 경무대 쪽으로 가는 길에 진명여고 앞에서 제지를 당해 돌아왔다. 
경무대 근처에 도착하니 총소리가 났고 부상자들을 경찰이 감추고 내주지 않아 한동안 대치를 했다고 한다. 
'부상자를 다 내놓으라' 소리친 기억이 있으며 경찰들이 '부천, 부평에 있는 미군병원으로 다 후송했다'고 답했으나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무청 앞에서 총소리가 나고 시민들이 부상을 입어 구호활동을 시작하게 됐으며 지나가는 택시나 트럭에 부상자들을  싣고 병원으로 호송했다고 한다.
오전에 총격 사건 때 동기생 하나가 다쳤고 그게 이회백이며 전국 의대생 중에는 유일하게 총상으로 다친 사람이다. 이회백은 오전에  총을 맞고 당시 변호사를 하던 이인 댁에 가있다가 리어카에 실려 순화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고 다시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부상자 구호활동의 대부분은 긴 시간 동안 광화문 앞에서 지나가는 택시나 트럭에 부상자들을 싣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는데, 길  지나가는 트럭이나 택시들이 손을 들면 모두 차를 세워 부상자들을 후송해주었다. 서울대병원으로 부상자들을 후송한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자기 볼 일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
구술자 또한 서울대병원으로 부상자들을 호송한 뒤의 활동에 대해 거의 기억하고 있지 못하며 며칠 동안 부상자 구호활동을 했는지도 증언하지 못했다. 이후 4월 19일의 경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또 흰가운을 입고 참여한 다른 대학 학생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당시에도 연세대 의대생들이 나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으며 서울대 의대 외에 흰 가운을 입었다면 약대생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5. 참고자료

4‧19혁명기념사업회(4‧19사랑방회 엮음), 『4‧19혁명사』, 2003
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
정창현, 「4월민중항쟁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1   
박현채, 「4‧19민주혁명과 이의 계승」, 『사상』 4, 사회과학원, 1990    
김행선, 「선언문과 구호로 보는 4‧19」, 『내일을 여는 역사』 23, 서해문집, 2006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심영보(서울지역대학생)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52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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