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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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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오석보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백찬홍)
구술일자
2010년 10월 15일, 10월 27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2시간 33분 20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9년 출생 1960년 당시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학생으로 4월혁명 시위에 적극 참여 4.19혁명 유공자회 이사(현)
구술내용 요약
오석보는 1939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4‧19 당시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교 4학년생이었다. 현재는 4‧19혁명유공자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4월혁명 50주년을 기념하면서 4‧19 관련인사들의 예우와 4월혁명의 계승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구술자는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패를 일소하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고 구술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교류한 인사들 중에는 김대중 당시 민주당 부대변인, 김상현 등이 있었다.
구술자가 중고교를 다니던 50년대 중후반에는 자유당 정부에 의한 관제데모와 집회 동원이 만연했다. 구술자는 주요 정치인이 지나가면 박수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증언했다. 구술자가 재학했던 건국대 학도호국단은 친정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3‧15 부정선거 이후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진행되자 신문지상에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구술자는 정치학회에 가입해 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당시 정부나 학교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마산을 필두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진행되었고 당시 정권은 간첩이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등의 왜곡된 정보를 유포하면서 시위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이 떠오르면서 건국대 학생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경찰이 독재의 앞잡이다', '봉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4‧19 당시 건국대학교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과 성동구 화양리에 2개의 캠퍼스로 나누어져 있었다. 구술자가 속한 정치외교학과는 낙원동에 소재했다. 구술자를 비롯한 시위대는 교수 및 학교직원, 학도호국단의 방해 등으로 사전 학내집회는 개최할 수 없었다. 당시 구술자를 비롯한 시위 지도부는 각 단과대학과 도서관 등을 돌아다니면서 시위 참여를 독려했고 이때 1천여 명이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낙원동 캠퍼스에 속한 건국대생들은 곧바로 광화문과 시청 앞으로 진출했고 화양리에 있던 학생들은 경찰이 도로를 막자 우회해서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구술자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연설에 능해 승용차 위에서 연설하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구술자는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까지 진출해 수많은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던 중 경찰이 쏜 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다리 아래쪽에 관통상을 입고 인근 병원에 입원했으나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는 당일 거리시위에도 참여했다.
4월 26일 구술자는 병원에서 나와 종로로 진출해 대중을 선동했다. 구술자는 종로를 지나던 계엄군과 마주쳤으나 군인들이 시위대를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당시 지휘관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구술자는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매카나기 당시 주한미대사를 꼽고 있다. 이승만은 시위대 대표, 매카나기의 설득 등으로 하야를 선언했고 그는 경무대를 나와 도보로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구술자는 이때 시민들 중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구술자는 이승만 하야 이전에도 시위대가 일부 치안을 담당했으며, 자신이 서울 시청 옆에 있던 국회담당 치안담당자였다고 구술했다. 당시 낙원동 건국대 캠퍼스 학생들은 종로를 접수했고 동국대는 중부경찰서, 연세대는 서대문경찰서를 담당했다. 당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군대만으로는 치안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치얀유지를 요청했다. 치안유지 과정에서 구술자는 학생 일부와 군중들이 이기붕과 최인규 등 당시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인사들의 집을 방화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4‧19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게 되고 인권과 민권이 신장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구술자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현실정치에 참여해 박정희 정권과 대립해 한일굴욕외교 반대, 3선개헌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구술자는 4‧19혁명유공자회 임원으로서 유공자들의 처우개선과 4월혁명의 계승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승만 동상세우기 운동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00여 명의 희생자와 5천여 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동상을 세우는 것은 역사왜곡이라고 말한다. 4‧19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 4‧19 현장답사와 역사교육, 논문경시대회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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