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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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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홍충식
면담자
이영재
구술일자
2010년 11월 18일
구술장소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39분 21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2년 출생 1960년 당시 동북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협심회 활동을 하며 4월혁명 적극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7남매 중 5번째로 출생했다. 부친은 작고하셨고, 어머니는 현재 97세로 생존해 계신다. 1960년 당시 한 달에 여섯 일곱 번은 끼니를 굶을 정도로 어려웠다. 구술자는 황해도, 함경도, 거제도, 부산, 서울 등 6군데 초등학교를 다녔고, 용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세사정으로 졸업을 못하고 2학년까지 수학했다. 고등학교는 남대문 시계 중고상에서 일할 때 시계를 팔던 형의 도움으로 동북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구술자는 1959년 1학년을 월반하고 2학년으로 입학하여 1960년 4월혁명 당시 3학년이었다. 당시 동북고등학교는 장충동의 엠버서더 호텔 북쪽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동북고등학교 야간부 학생회장(학도호국단)으로, 《Student Times》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Student Times》는 당시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영자신문이었다. 구술자는 협심회의 구심체적 역할을 하였다. 영자신문 기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타 학교를 방문하기가 용이했다. 이 협심회는 2009년 홍영유 작가에 의해 발굴되어 4월혁명과 관련한 고교생 조직으로 소개되기도 한 조직이다. 그러나 구술자가 전하는 협심회의 결성 계기는 농촌봉사활동 조직이 그 출발이다. 협심회는 대부분 야간부 학생들 위주로 구성되었고, 8개 학교 정도에 약 20여명이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야간고 학생들이 12명, 주간고가 8명으로 기억한다. '협심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계성여고의 이수자라는 여학생의 제안으로 정해진 것이다.
협심회의 첫 활동은 1959년 여름 농촌봉사활동이었다.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된 협심회가 학교장의 신임장을 받아 농촌봉사활동을 한 것을 계기로 그 후에도 모임을 몇 차례 가지게 되었다. 첫 모임은 제과점에서 시작하여 중국집 등에서 모임을 하였다. 모임을 가지게 된 계기는 시국과 관련한 의사표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대구의 2‧28 이전인 2월 20일, 학내의 자유를 위한 실천을 준비하기 위하여 청계천 2가의 수표교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다. 주된 내용은 '교장 선생 물러가라', '학원의 자유'였다. 처음 모이게 된 이슈로 '관제동원 줄여 달라', '학도호국단을 자율적 학생회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약 8개교 연합 봉사활동 조직이 봉사활동 후 그 유대를 유지하던 중 시국의 상황과 관련하여 1960년 2월 모임을 갖게 되었고, 이 과정에 4월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구술자는 협심회의 성격에 대해 "『4월혁명통사』에서 저자 홍영유 선생이 너무 그 협심회를 크게 부각을 시켜주셨는데, 사실 그렇게 크게 기여한 바는 아닙니다. 아니였고, 단지, 2월 중순에 에… 복수의 학교들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의 학생들이 모여서 뭔가 모의를 했다, 근데 그 멤바 중에 협심회 출신이 몇 명 있었다, 그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그 단체가 어떤 그 모의의 핵이었다…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너무 과대평가된 거 같은데 그 부분이… "라고 말한다. 
이외에 구술자는 4월혁명의 준비과정에서 역할을 한 부분을 강조하였다. 구술자는 4월 18일 고대 학생들의 피습과정에 동북고를 포함한 야간부 학생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고 전한다. 구술자는 4월 18일 밤 학교에서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4월 19일 시위 현장에서 동료인 민병록 군이 총격 당한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구술자는 4월혁명이 대학생의 시위나 학생 혁명이 아니라 시민혁명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공로자 인정과 지원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강조하였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