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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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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병태
면담자
이영재
구술일자
2010년 11월 19일
구술장소
이병태 치과의원
구술시간
2시간 8분 44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2년 출생 1960년 당시 동성고등학교 3학년으로 4월혁명 시위 적극 참여일기로 기록 남김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1942년 경기도 고양군에서 태어나 국정교과서에 재직한 아버지 덕분에 안정적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 6‧25를 겪으며 경주 등지로 피난가고, 초등학교를 6군데를 다니면서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술자는 동성고등학교 3학년 당시 4월혁명을 경험하고, 같은 해 서울대학 치의과에 입학하여 현재 이병태 치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80년대 <안녕하십니까 이병태입니다>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할 정도로 정치, 사회적 지식과 수필을 쓸 정도로 문장력을 겸비하였다. 취미생활로는 산악회 활동을 하고 있다. 
구술자가 기억하는 선생님들은 4월혁명 당시에도 동성고 학생들의 안전을 위하여 시위 현장에 직접 동참하고, 학교에서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학교 등사기, 광목천, 유인물 용지 등의 사용을 묵인해 줄 정도였고, 학업과 관련해서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최선을 다한 최고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동성고등학교는 구술자가 입학할 당시 180명이 입학하여 140여 명이 졸업할 정도로 많지 않은 인원이었으나 4월혁명 과정에서 최선두에서 총격을 받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동성고가 자리하고 있던 위치는 경무대 앞 효자동 인근으로 구술자의 일기에 메모된 약도에 따르면 총격이 진행되는 최일선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에서 출발하면서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준비한 학교로 당시 고교생의 시위 참여에 있어 상당한 준비가 이루어진 학교였다. 플래카드의 주요 내용은 '무저항주의', '민주주의 사수'였다. 
구술자가 기억하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자유당' 일화로 표현된다. 당시 동료들과의 게임이나 약속을 어기는 학생을 일명 '자유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술자는 일기, 사진, 당시 유인물 등 관련 자료를 최근까지도 잘 소장하고 있다. 의대 입학 후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4월혁명 참여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판단하여 2009년이 지날 무렵까지 4월혁명 참여자임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동성고의 동료들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동성고가 대광고와 함께 대표적인 고교생 시위 참여 학교로 거론되면서도 건국포장 등의 공로자 대상자가 극히 미미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에는 개인적 차원과 학교 차원의 기록을 공개하며 당시 4월혁명에서 동성고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구술자는 당시 총격 현장 중 한 곳인 경무대 앞에서 시위에 참여한 인연으로 진명여고 박용경 교장과의 인연을 오랜 기간 유지해 왔다. 구술자는 4월혁명 경험자 중 총격 현장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한 당사자이면서 총격 후 분노한 학생들의 시위에도 결합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구술자는 1990년대 초반 졸업생 모임을 중심으로 기념비 건립 등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최근에는 모교인 동성고 재학생들에게 4월혁명의 의미에 대해 2차례 강연을 하기도 하는 등 4월혁명과 관련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구술자는 당시 동성고의 4월혁명을 깨끗하고 정열적인 시위로 평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4월혁명의 주요 사실들을 발굴하여 동성고의 주요 역할과 활동들이 드러나길 바라고 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