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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구술자소개

구술자
이상철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박정수)
구술일자
2010년 8월 24일
장소
구술자 개인 사무실
구술시간
1시간 6분 28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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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인 이상철은 4‧19 당시 양정고의 학생위원장이자, 고등학생 연합모임인 협심회의 회원이었다. 또한 럭비선수를 하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협심회의 활동 특히, 양정고의 4‧19 시위에 대해서 자세히 진술하고 있다. 
협심회는 고등학생들의 친목단체로 만들어졌다. 협심회는 중동, 대광, 배재, 동성이 확실하게 참여했으며 설송웅이 적극적이었다. 
2‧28을 전후해서 조금씩 시국현황을 인식하고 협심회에서 현실문제들을 토론하게 되면서, 4‧19 이전 서울에서 일어난 다양한  학생시위를 계획하게 된다. 양정고는 4‧19 이전까지 학교 차원의 시위참여는 없었다. 그러나 수표교회에서 몇 번 만나 나랏일을  걱정하기는 했는데 구술자를 포함해 양정고 전체가 참여하지는 않았다. 개별적으로는 3월 16일 안국동 민주당 당사 앞 학생시위에  일부 참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날이 춘계리그가 잡혀 시합이 있을 때였다.
4월 18일 고대생 테러 후 저녁 시공간 시위에는 구술자도 참여를 했다. 구술자 기억으로는 협심회나 양정고 전체 차원은 아니었다.
4‧19 당일 양정고는 학생위원장 선거가 있었다고 하는데 구술자는 이를 부인했다. 오전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는데 학생 두어  명이 구술자를 불러 시위를 촉구했다. 구술자가 학교 간부들을 모아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하였는데 교문이 잠겼다. 후문을 부수고  나가 염천교 다리로 해서 배재고로 가서 동참을 촉구했지만 정문이 잠겨 있어 소리만 질렀다. 2교시 끝나고 10시쯤 출발해서 시청  앞에 다다랐을 때가 10시 반 11시 쯤 되었다. 당시 선생님들은 시위를 말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지를 하거나 방해를 하지는  않았다. 교문은 수업중이라 잠겨있던 것이다.
4열 종대로 스크럼을 짠 양정고는 학생들의 전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덕수궁, 의사당, 중앙청을 거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발포 이후에는 방송국을 점령하자 해서 안국동 네거리를 빠져나와 을지로2가로 갔다. 거기서 동국대로 여겨지는 대학교 학생들과  대광고 학생들과 합류해 남산으로 가는데 까만 것이 보이는데 그게 총구였다. 계엄령이 났으니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자고 했다.  남대문을 거쳐 염천교 다리를 건너 서울역을 보니 총소리가 나고 있었다. 학생들 중 희생자가 생기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탈자가 생기지 않게 해서 학생들을 인솔해 학교 운동장에 갔더니 학생보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 운집해 있었는데 학부형들이었다. 
양정고는 학생회 간부들의 주도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희생자는 없었고 학부형들이 모두 데리고 집으로 귀가를 했다. 다만  데모를 주도한 학생들은 경찰서에서 잡으러 온다 해서 모두 도망갔다. 구술자는 20일부터 문산 쪽으로 가서 숨어 있었다. 구술자는 약  2주 동안 학교를 가지 못했다. 숨어 있다가 학교에서 괜찮다고 통보가 와서 지금 전쟁기념관 자리에 나갔다. 당시에 국방부에서  전국의 데모 주동자를 다 모았는데 잡혀가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건국포상을 주었다. 고등학생으로는 중동, 대광, 배재, 낙양  학생들이 왔었다.
4‧19 이후 양정고의 집단적인 시위는 없었지만 구술자를 포함해 몇몇이 4‧25 대학교수단 시위 등에 참여하였다. 
한편 구술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이었고 나라를 위해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밑에 사람들이 잘못해서 부정부패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또 4월혁명은 학생의 의한 혁명이고 그 학생에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중학생이 모두 포함되었다. 즉 대학생 주도의 혁명이라는 데에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이상철(서울중고등학생)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8013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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