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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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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우재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임미리)
구술일자
2010년 7월 19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36분 24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6년 출생 1958년 서울대 농대 수의학과 입학 1960년 당시 4월혁명 서울대 시위 참여,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공동의장 활동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이우재는 충남 예산에서 1936년 출생하여 예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여 4월혁명에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주세중의 『꿈』을 읽고 농촌사회를 이상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처음부터 농촌운동을 할 목적으로 서울대  수의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때문에 구술자는 매우 의식적인 대학생활을 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의 경우 문리대가 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수원의 농과대학도 학생운동에 있어 강경한 분위기가 있었다. 수의학과는 당시 서울  캠퍼스에 있으면서 독립된 단과대학이었는데 구술자는 수의학과의 주축인 동시에 문리대와 교류하는 한편 농사회 등 활동을 통해 수원의  농과대학과도 많은 교류를 했다. 당시 농사단은 농촌운동 중심의 조동주 그룹과 정치운동 중심의 김성호 그룹이 있었다.
4‧19를 전후해서는 4월 18일 서울대 수의과대학 잔디밭에서 김상종(함석헌의 외조카)의 주도로 열 몇 개 대학이 모여 논의를  하다가 20일 궐기를 하기로 했다. 이때 모인 대학은 국민대, 동국대, 경희대 등이며, 고대와 연대는 없었고 여자 대학도 없었다.  잔디밭에 앉아있을 때 한 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 고대생 가두진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판이 끝나는 것을 보고  들어왔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에 다들 분야별로 학교별로 연락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모임 결과 구술자는 19일 오전 공대(현재  태릉 산업대학교 자리)를 교섭하기 위해 태릉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11시쯤 청량리에 왔을 때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의과대학 후배 몇몇에게 데모 준비하라는 얘기는 했지만 이미 시위가 본격화됐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와 조직적인 준비를 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쪽을 택했다.
4월 19일 오후부터 자정까지 시위대에 참가하였으며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불타는 장면, 이기붕 자택 앞 상황을 광경을 목격하였다. 또 군경들이 시위대에 심정적 동조를 하는 것에 대해 증언을 하였다.
경찰과 군이 시위대에 상당히 호의적인 것을 목격하였다. 경찰과 군인들도 불만이 축적돼 있기 때문이고 헬멧을 집어던지며 호응하기도 했다. 
시위대가 버스를 뺏는 등의 행동을 보고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질서유지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4‧19 저녁에는 친구의 집에 가서 묵었으며 20일부터 교수데모 전까지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구술자는 4‧19 당일 상황보다는 오히려 이후 학생회 조직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하였다. 4‧19 직후 학도호국단이 없어지고  서울대학교 학생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구술자는 학생회 정관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12개 단과대에서 6개 대학은 4학년생인 기존  학도호국단장들이, 6개 대학은 3학년에서 대표 1명씩이 참여해 모두 12명으로 학생회 구성했다. 전체 학생회장 선거는 없었고  12명이 돌아가며 1개월씩 대표를 했다. 4월혁명 후, 재선거를 위해 국민계몽대회를 조직하는데 여기서 공명선거 국민계몽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이후 알려졌으나 사실은 요즘 의미의 총학생회장은 아니다. 
4‧19 이후 사회개혁을 위해 신생활운동을 하였는데 구술자와 안병규, 사대 학생회장 세 명이 공동대표 역할을 하였고 이후  민족통일연맹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학생조직이 생겨나고 수원의 농대 조동주가 혁명과업 완수를 기치로 학생 약 1천 명을  이끌고 서울 캠퍼스로 올라오는 일이 벌어졌다(일면 서울농대 100리 도보행군).
공명선거운동에서 신생활운동으로, 이후 정치, 민족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고, 문리대와 법대 학생회장, 이우재 세 명이 의장단을 구성했다.
한편 구술자는 4월혁명을 주체 세력을 분명하게 대학생이라 강조하는데 이는 이전에 있었던 중‧고등학생이나 도시빈민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자생적 반발이기는 하나 목적의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 정국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이후 이를  계승한 집단은 대학생이기 때문에 4월혁명의 주체는 대학생이 맞다고 역설하였다.


5. 참고자료

이우재 外, 『4‧19 세대 의원에게 듣는다』, 『국회보』390, 국회사무처, 1999
이우재, 『한국경제와 농업문제 (이우재논집 1)』, 한울, 1992
이우재, 『한국농민운동사연구』, 한울, 1986
이우재, 『비록 골짜기에 있을지라도...맑은 향기를 내리라』, 사회문화연구소, 1995
이우재, 『이우재의 삶과 정치 이야기』, 서지원, 2002
이우재 外, 『4‧19혁명론』, 일월총서, 1990
4‧19혁명기념사업회(4‧19사랑방회 엮음), 『4‧19혁명사』, 2003
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
박현채, 『4‧19 민주혁명과 이의 계승;민족민중론의 시각에서』, 『사상』 4, 사회과학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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