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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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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재환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백찬홍)
구술일자
2010년 10월 28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37분 47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8년 출생 1960년 당시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학생으로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 산하 학생특별위원회에 참여하여 3.1절 삐라사건 등 4월혁명에 적극 참여
구술내용 요약
이재환은 1938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출생했으며 4‧19 당시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었다. 이재환은 4‧19와 관련하여 현재 4‧19사랑방 상임부회장을 맡고 있고, 남북경협운동본부와 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의장으로 주로 통일운동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다. 
구술자가 재학했던 경희대에는 공식적 학생기구로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이 있었지만 친정부성향에 학교당국이 단장을 내정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학내에는 서울경시청 소속 정보과 형사가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사찰했다. 
이재환은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민주당이 주도하는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 산하 학생특별위원회에 참여해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위원회는 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3‧1절 때 이른바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사건은 이른바 3‧1삐라사건이다.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위원회'는 3‧1절 41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부정선거 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뿌렸다. 이 사건은 부정선거에 반대한 서울의 최초 움직임으로 기록되고 있다.
구술자는 경희대 학생들과 4‧19를 전후해 시위 계획을 세우지만 학교당국의 방해와 정보과 형사들의 사찰로 집회를 갖지 못했다. 대신 서울 종로 일대 남궁다방‧교차로다방 등을 전전하면서 향후 운동방향이나 시위를 계획했다. 또한 민주당 이철승을 비롯한 당시 야당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정당과 학생운동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했다.
4‧19 당일 구술자를 비롯한 경희대학생들은 학내 집회를 열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 인근 청량리역에 모여 20여 명 정도가 시내로 진출했다. 경희대 시위대는 신설동, 동대문, 종로를 경유해 광화문으로 집결했고 소수가 참여했기 때문에 곧 전체 시위대에 휩쓸려 들어갔다. 구술자는 이날 동국대와 고려대를 제외하고는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 외는 현수막이라든가 특별한 준비물이 없이 집회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날 전체 시위대는 시청에서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로 진출했고 구술자도 당시 경기도청(현재 KT)근처에 도착했는데 경찰의 사격을 개시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 경희대는 오명환이 충격을 받고 인근 수도의과병원에 입원했고 현재까지 4‧19부상자동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구술자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에도 서울은 물론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고 증언한다. 구술자 역시 시위에 참여했고 주로 공명선거추진학생위원회 회원들과 함께했다고 말한다. 그는 4월25일 교수단의 성명발표는 시위의 분수령이 된 것만은 사실이지만 좀 더 일찍 했더라면 희생자들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구술자는 4월 26일 당일 무교동 근처에서 군중들의 환호소리를 듣고 이승만이 하야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승만 하야 이후 구술자는 치안활동보다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질서회복과 4‧19 정신을 선양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그가 다닌 지역은 철원, 화천, 금화, 양구 등을 전방지역으로 주로 질서회복과 4월혁명 정신의 의미 등이었다. 구술자는 4‧19 이후 각계각층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그것을 빌미로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했고 이 사건으로 4‧19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민주주의는 철저히 말살되었다고 말한다. 5‧16세력이 구국이라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했는데 오히려 장기집권은 물론 독재를 했기 때문에 이승만보다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구술자는 4‧19혁명을 성공한 혁명이라 평가하며 4‧19에 참여하여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 시위는 일부 폭력적인 면이 있지만 대부분 평화적이었고 또는 집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순수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4‧19를 통해 민주화가 되고 그것을 토대로 산업화가 된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편으로 4‧19 세대의 정치참여는 5‧16세력의 회유와 개인적인 영달에 의한 것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4‧19 정신을 제대로 실현한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 
구술자는 4‧19는 헌법전문에도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제2의 개국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차원의 관심과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