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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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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복진풍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11월 24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55분 19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8년 출생 1960년 당시 건국대학교 학생으로 3.1절 삐라사건, 공명선거추진위원회 활동 등 4월혁명 과정에서 적극 활동
구술내용 요약
"1. 면담자 :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복진풍은 우국충정의 정신이 남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조선 말기 궁내부 주사였고, 할머니는 일제에 쫓기는 집안 출신이었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비분강개한 할아버지는 팔도를 떠돌다 객사하였다. 할머니는 어린 3형제를 데리고 청양으로 피난하였다. 복진풍의 아버지는 망국의 설움과 집안의 한을 자식교육을 통해 풀고자 하였다. 복진풍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문 독선생으로부터 소학, 논어, 주역 등을 배웠다.
그의 집안이 터를 잡은 청양 일대는 최면암 선생,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등 우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곳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과 집을 드나드는 식객 등으로부터 이들 우국지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초등학교 4~5학년 때는 담임선생이 윤봉길 의사와 학교 동기생이었다. 그는 담임선생을 비롯한 스승과 어른으로부터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인물이 되라는 가르침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제도 교육은 순탄치 못하였다. 국민학교 시절 1등을 놓치지 않고 공부에 대한 열의도 강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니던 수정국민학교를 그만두고 1년여를 쉬게 되면서 여러 학교를 전전한 것이다. 사양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청양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공백기가 있었던 데 따른 주변의 눈총을 의식해 대전중학교로 전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편입 시험을 보는 날 갑자기 큰비가 내려 길이 끊기는 바람에 응시를 하지 못하였다.
그의 집은 그를 경기중학교로 보내기 위해 서울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종로구 화동에 터를 잡고 옛 동아일보사 터에 손으로 찍는 구공탄 공장을 차렸다. 종로구 일대에 땔감을 공급하는 일이 크게 번창해 그의 집은 많은 식솔과 인부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경기중학교에 들어갈 티오[T/O]를 기다리던 그는 하나 나온 자리를 단성사 사장이 거금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아들을 넣는 바람에 일류고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뒷날 4월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수송전기공업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중에 일어났다. 대학 입시 공부에 매진하던 그는 학교로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웅변대회에 출전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내키지 않았지만 학교의 명예를 높이는 일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훈육 주임으로부터 취소를 통보받고 '너 빨갱이야'라는 말을 듣는다. 경찰관 등을 폭행하고 언론에 자유당 입당 강요 사건을 폭로한 것 때문이었다.
1958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영일을구 보궐선거 등은 3‧15 부정선거를 위한 예행연습 격이었다. 이를 앞두고 자유당은 1가구 1당원 제도를 시도하였다. 많은 식솔과 인부를 거느린 그의 아버지도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로경찰서 주임과 자유당 종로구당 간부, 그리고 화동 동장 등이 매일 그의 아버지를 붙잡아놓고 술을 먹이며 설득하였다.
어머니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 현장을 찾아가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는 경찰과 자유당 간부 등을 폭행했다. 이들은 선거법을 위반한 사실이 두려워 그를 고소하는 것은 물론 조사조차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 대신 그의 집 일대의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렸다. 그는 애꿎은 피해자인 인근 주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연명을 받아 전기와 수도를 공급해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해 언론사에 제보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취재해 보도하자 경찰은 그를 사찰하고 학교에도 압력을 넣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일이 바로 훈육 주임의 부산 웅변대회 참가 불가 통보였던 것이다.
그와 동료 학생들은 학교의 처사와 훈육주임의 언동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웅변대회 불참 통보 경위를 해명하고 '빨갱이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집단행동 등을 문제 삼아 학교 측은 그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의 아버지도 "학생을 빨갱이로 모는 학교에 더 이상 자식을 보낼 수 없다"며 그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복동규‧복진풍 부자는 정치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윤보선, 김상돈 의원 등 주변의 도움을 얻어 그는 균명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고 건국대학교 법학과에 편입학한 뒤 학생운동을 더 활발하게 하기 위해 정치외교학과로 전과를 하기에 이른다.
1960년 2월 28일 4‧19 전야에 탄생한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는 다음날 서울운동장에서 군중집회를 갖고 4월혁명의 의지를 담은 유인물을 대량 살포한다. 이 3‧1절 삐라사건으로 구술자는 연행, 제적, 병역기피 혐의 체포 등 또 다시 희한한 수난을 당한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장이욱 전 서울대 총장 등 당시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한 공명선구추진전국위원회의 30명 상임위원 가운데는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 대표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4월혁명의 학생 주역들은 정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당당하고 도도하기까지 하였다.


5. 기초자료 목록 

연정60년사편찬위원회, 『延政六十年史 1945-2004』, 씨아이알, 2004
학민사 편집실,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93(5판)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국 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한길사, 199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정국로, 『한국학생민주운동사』, 도서출판 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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