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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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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변우형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박정수, 박재홍)
구술일자
2010년 7월 12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28분 9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2년 출생 1960년 동성고등학교 3학년으로 4월혁명 동성고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변우형은 1960년 동성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을 맞이하였다.  
구술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반학생으로서 4‧19 이전 고등학교 연합모임이나 학교 내의 학생회 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3‧15 부정선거와 4월18일 고려대생 피습사건이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이 4월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4월 19일 아침 보충수업 시간에 그냥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돌았다. 1교시 끝나고 모이자고 하여 10시경 운동장으로 학생들이  모였다. 당초 3학년만 모이자고 했는데 1학년들까지 모두 나왔다. 학교 근처에 정사복 경찰들이 와 있었고 교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 교문을 나서자 바로 한두 명이 끌려갔으나 곧 돌아왔다. 아마도 붙들어둘 명분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구술자는  증언했다. 
플래카드와 구호는 당일 준비되었는데 구술자는 '무저항주의' 현수막을 들고 동성고 시위대 맨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촉구했는데 서울대도 막 나가려고 하던 상황이었다. 서울대와 합치지는 않고 별도로 움직였다. 
종로5가에서 화신 앞으로 갔더니 경찰들이 막아서 미도파, 소공동, 시청으로 해서 광화문, 광화문에서 경무대까지 갔다. 도중에  불자동차(소방차)를 만나기는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시위대 쪽으로 넘어와 소방차는 그냥 왔다갔다 하기만 했다. 도중에 만나 여러  학교들이 목적지는 모두 경무대이기는 했지만 섞이지는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시민들이 가두에서 환호를 보내기는 했지만 합류하지는  않았고 합류를 바라지도 않았다.
경무대에 다다라서는 동성고 앞 쪽으로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다. 이때 총소리가 나면서 시위대가 흩어졌고, '엎드려' 소리가 나서  엎드렸다 일어나니 모두 사라지고 동성고 학생들만 400~500명 있었다. 공포탄이 아닌 직격탄이었기 때문에 예닐곱 명이 다쳤고 이  중에는 사망한 학생도 있었다. 다친 사람들이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갔던 길로 되돌아왔는데 오는 도중 박수를 받기도 하고, 물을  주는 시민들도 있었다.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7시경으로 종례를 하고 모두 귀가를 하였다. 4월 20일 이후에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이후 벌어진 수습대책에도 참여하지 않고 대학입시를 위한 학생 본연의 임무로 돌아 왔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