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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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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배극일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박재홍)
구술일자
2010년 6월 28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2시간 14분 19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0년 출생 1960년 대광고등학교 3학년 대대장으로 4월혁명 대광고 시위 주도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배극일은 1960년 대광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을 맞이하였다. 당시 대광고 내 대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대광고등학교는 설립자의 기본 취지(미션 스쿨)에 의해 학생들 간에 개인적 의사존중과 학생회 운영에 있어 선생님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율성을 존중해 주는 풍토였다. 이의 영향으로 인해 학교 내 학생들의 결속력은 강한 편이었으며, 3‧15 부정선거와 4‧18  고려대생 피습사건은 대광고 시위의 촉매 역할을 하였다. 
4월 18일 7교시가 끝난 3, 4시경, 고려대생들이 피를 흘리며 스크럼을 짜고 학교 앞을 지나갔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  구술자는 감흥길, 이문길, 박웅균, 문복강과 모여 다음날 거사를 논의했다. 양조장을 하던 전병화의 집을 가서 상세 계획을 세우고  결의문을 작성했으며 밀가루 포대로 플래카드를 제작했다.
하지만 대광고는 4‧19 이전 시위와 관련하여 외부의 협력이나 학교연합체(단체)의 연락을 받은 것은 없었다. 
19일 시위는 오전 8시 30분경부터 전개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시위는 상당히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는데 힘 있는 학생들이 교무실 문을 막아서 선생님들의 저지를 사전에 차단하였고 호각을 불어 학생들을 운동장 단상 앞으로 모았다. 시위대는 1진, 2진으로 나눠 가두로 진출했다.
교문을 나와서는 동대문을 거쳐 종로5가, 시청 앞을 향해 구호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형성하여 시위를 벌였다. 종로5가에서 소방차가  물을 뿌렸으며 곤봉을 든 청년(깡패이거나 반공청년단으로 추정)들을 만났다. 종로5가에서 마로니에 쪽으로 향했는데 서울대 학생들은  시험인지 별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대광고 학생들이 가장 이른 시간에 시내로 진출하면서 그 길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와 동성고  학생들에게 동참을 촉구하기도 했다. 
12시경 가두로 나갔던 대광고 전교생 1천 명 중 8백 명 가량이 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당시 학생회장이던 방정웅이 결의문을  낭독한 뒤 구호를 낭독한 뒤 다시 가두로 진출했다. 앞줄에 3학년생이 서고 2학년은 뒷줄, 가운데에 1학년생을 세웠다. 
질서 정연하게 구호만 부르면서 종로를 거쳐서 시청 앞으로 갔다. 와이엠씨에이(YMCA) 앞에 갔을 때 이북방송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 네 명이 지프(Jeep)차 위에 올라가 피 흘리는 시신을 번쩍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청 앞에 갔을 때 서울신문사가 불타는 것을 보았고 총소리가 들려왔다. 동국대와 일부 서울대학, 동성고가 선두에 서서 경찰과 맞대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직후 학생들의 안전을 우려한 송성찬 선생님의 만류로 오후 5시경 해산하였다. 
4월 20일 이후 계엄령 선포에 의해 학생들은 집으로 귀가조치 되었으며, 이후 전개된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에 이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발표 전까지 체포의 두려움은 있었으나, 학생 본연의 임무로 돌아왔다고 구술자는 증언하고 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