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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률

구술자소개

구술자
박홍률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백찬홍)
구술일자
2010년 10월 21일
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56분 1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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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박홍률은 1938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했고 4‧19 당시에는 홍익대학교 법과대학 졸업생이었다. 구술자가 법학을 택하게 된 것은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청렴한 법조인이 되어 사회를 바로잡고자 했다. 구술자는 홍익대 3학년 때 학도호국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각 대학 학도호국단장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당시 학도호국단장들은 구국학생연맹 등을 조직해 관제데모를 하는 등 친정부 성향이 강했으나 구술자를 비롯한 일부 호국단장들은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9년 11월 1일 광주학생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각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자유당 정부에 대한 입장 문제로 물리적 대립까지 하기도 했다. 
4‧19를 전후 2월 대구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마산을 비롯한 전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4월 11일 김주열의 주검이 발견된 후 정국이 대혼란에 빠지자 박홍률을 비롯한 반정부 성향의 서울지역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종로 백조다방과 왕실다방 등에 모여 시위를 계획했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4월19일 10시 서울시청 앞에 집결하기로 하고 이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다. 
4‧19 당일 홍익대는 학도호국단 민병천 단장, 김재각 부단장, 장진호, 추운석 등 중심으로 지도부가 구성되고 구술자는 배후에서 역할을 했다. 당시 홍익대는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미대 쪽 동원에 힘을 기울였다. 당일 홍익대는 오전 중에 신촌 로터리에서 연세대학교 학생들과 조우한 후 시청 앞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날 홍익대는 오전 9시 집결했고 전체 학생 3800여명의 학생 중 1600~1700여 명이 동조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때 미대 소속 여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져 당시 시위에 소극적이었던 이화여대나 숙명여대와 비교가 되고 있다. 정문을 나가기 전 학생과장 등 학교 측의 일부 방해가 있었으나 학생들의 진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촌로터리를 지난 연합시위대는 서대문 이기붕 저택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자 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대문을 경유해 서울시청으로 진출했다. 당시 시청 앞에는 동국대생과 고려대생들이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이날은 시민들보다는 학생들이 다수였고 시위가 진행되는 도중 일부가 경무대 쪽으로 진출하게 되자 홍익대생들도 동참했다. 시위대가 광화문을 거쳐 중앙청 쪽으로 진출하자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바리케이드 등을 설치하고 저지하고 있었다. 
시위대가 중앙청을 지나 경무대 방향으로 진격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홍익대 2학년생인 나주완도 복부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됐다. 나주완은 1년 여 동안 치료를 받던 중 결국 사망했다. 당일 시위는 한밤중까지 진행되었다. 
(* 나주완-> 나영주로 추정, 1년 여 동안 치료를 받던 중 사망 ->3년 후 사망(1963년 11월 27일)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에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와중에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퇴했으나 이승만은 사퇴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이에 25일 전국 각 대학 교수 258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들은 3‧15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단 시위는 자유당 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당일 야간시위를 벌이며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26일에는 아침부터 다시 학생들은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웠다. 홍익대 학생들도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힘을 얻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미 상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한 송요찬을 비롯한 계엄군은 진압을 포기했고 시위대 중 일부 자원자를 선발해 이승만과 면담하도록 했다. 이후 이승만은 계엄사를 통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구술자는 무교동 인근에 있었고 시위대들의 환호 소리에 사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이 하야하자 학생시위대는 각 학교별로 인근 경찰서를 접수해 치안활동에 나섰다. 홍익대는 연세대학교와 함께 서대문경찰서, 동국대학교는 중부경찰서, 고려대는 성북경찰서 등등 맡았고 국민들도 이에 동조했으며 계엄사 역시 협조적이었다. 구술자는 졸업생인 관계로 직접 치안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때 치안활동은 시위로 어지러웠던 시내 청소를 하는 등 사회분위기를 안정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구술자는 4‧19 이후 총선을 통해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4‧19 정신에 대한 몰이해와 통치 미숙으로 여러 분야에서 시위가 계속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구술했다. 특히 혁신 계통의 시위가 가장 활발했다, 이후 1년 만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4월혁명은 의거로 격하되고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강제입영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구술자는 이를 피해 신문사에 입사했다. 박정희 정권은 5‧16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4‧19 참여자에 대한 포상을 실시했으나 쿠데타를 지지한 인사들에게만 혜택을 부여해 4‧19 세대 간의 분열을 초래했다.
구술자는 4‧19가 많이 퇴색한 이유 중 하나는 4‧19 참여자들의 일부가 정치 쪽에 참여해서 5‧16 세력이 주축이 된 공화당, 유신세력과 손잡았기 때문으로 본다. 공화당으로 간 사람들 중에는 서울대 출신 이태섭, 경희대 출신 정동성 등이 있다. 야당에도 중앙대 출신 유용태가 있다. 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능력이 있어 정치에 참여했겠지만 대체적으로 4‧19 정신과 맞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구술자는 생각한다. 구술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4‧19 때 2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등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동상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고 있다. 현재 4‧19가 제대로 평가받고 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3개로 나누어진 단체가 통합해야 한다고 했다. 
구술자는 현재 역사교육의 부재로 4‧19가 퇴색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그나마 살만한 나라가 된 것은 4‧19세대가 이룩한 민주화와 그 다음 세대가 이룩한 산업화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인식해 정부도 4‧19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함께 유공자에 대한 적절한 예우를 부탁하고 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박홍률(서울지역대학생2)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229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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