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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덕희

구술자소개

구술자
류덕희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이주실)
구술일자
2010년 11월 18일
장소
경동제약 회장실 접견실
구술시간
1시간 50분 42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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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류덕희는 193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까지만 화성에서 다니고 6‧25전쟁 전에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1956년에 성균관대학교 화학과에 입학을 해서 다니다가 집안 사정으로 휴학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복학해서 다녔다. 이 때문에 성균관대 화학과 4학년이던 1960년에 4‧19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4‧19 세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경동제약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류덕희는 4‧19 참여가 인생의 큰 지침이 되어 이후 삶에도 영향을 끼쳐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4‧19와 관련된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데 4‧19육영사업회와 4‧19혁명공로자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주는 포상을 받으려고 신청을 했다가 증거자료 입증이 되지 않아서 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주변 동료들이 다 인정을 하기 때문에 사실 관계는 틀림없다고 한다. 
구술자는 당시 성균관대 화학과 학생이었는데 1년 휴학을 했다가 복학을 해서 동기들은 졸업을 해서 1960년 4‧19를 경험하지 못했는데 본인은 휴학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되어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학과 재학 중에 성진회라는 써클을 만들어 친목 도모와 공부 등을 같이 하며 지내다가 주변의 추천으로 학생위원장에 출마하게 되었다. 구술자는 4학년이었던 1960년에 성대 학생위원장이 되었는데 주변의 추천과 성적 등을 따져서 입후보하여 선출되었다고 한다. 
학생위원장이 되어 학도호국단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도덕함양 웅변대회, 학술제, 체육대회 등을 했다고 한다. 
학생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던 중에 구술자는 경기도 화성 출신인데 2월경에 원래 경기도학우회 간부도 아니었는데도 경기도학우회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그 모임이 바로 3‧15 선거 전에 이승만, 이기붕 지지 성명 모임이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대학생들을 회유하여 지지 성명을 받았는데 이 때 거부하자 학생위원장 된 것을 무효로 할 수도 있다고 협박을 받기도 했다.
이 모임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경기도 단위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학도호국단장들이 경찰 등과 정치적 관계가 맺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명에 거부를 했던 구술자는 후환이 두렵기도 했으나 이 때 서명을 하지 않아서 당당하게 4‧19에 참여를 할 수 있었고 이후 4‧19 관련단체 활동 등에 부끄럽지 않게 참여하게 되었다. 
4월 19일 아침 구술자는 당시 성대 총장이었던 이선근 총장을 찾아가 평화적인 시위를 할 테니 허락해달라고 설득을 했는데 총장은 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 당시 구술자는 이선근 총장이 중앙선거관리위원이었던 사실을 몰랐으며, 4월 19일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서야 알았다고 한다. 총장과 면담 중에 이미 교내의 다른 학생들은 시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시위 참여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구술자도 바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대는 학도호국단 단위의 시위 계획과 참여 준비는 따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구술에서 드러난다. 
성대 시위대는 다른 학교에 비해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을 했는데 이 때 성대 학생처장으로부터 경무대 앞에서 발포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얘기를 듣고 시위대를 이끌고 경무대 쪽으로 갔다가 을지로 내무부 등을 거쳐 학교로 일찍 귀가했다.
학교에 도착한 뒤 성대생들은 이선근 총장을 나오라고 외쳐대기 시작하고 구술자는 세 번에 걸쳐서 총장을 설득하여 시위대와 총장이 만났는데 이날 이선근 총장은 본인이 당시 3‧15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잘 몰랐으며 책임을 통감하고 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읍소한 사실을 증언했다. 구술자는 성대 시위대는 평화적인 시위를 했기 때문에 희생자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19일 이후에 각 대학 대표들이 모여 명동성당에서 모여 4‧19 대책에 대한 모임을 하려고 하는데 가톨릭회관에서 회의를 하면 자동적으로 장면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시기여서 모임을 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학에서 회의를 해서 종합대학 10명, 단과대학 3명, 고등학교 1명씩 각 대학에서 4‧19대책위원들을 추천받아 4‧19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동국대, 중앙대, 건국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등 웬만한 학교들은 다 참여했다고 한다. 이후 4월 30일경 서울시장이 희생자 위령제를 지낼 테니 참석해달라고 했지만 거절하고 5월 19일날 서울운동장에서 위령제를 하기로 정했다. 이 4‧19대책위원회는 이후 희생자 위령탑 등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4월 25일 한양대에서 모임을 갖고 가두시위를 했다고 한다. 행당동에서 을지로6가까지 걸어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이후 5월 19일 준비하여 서울운동장에서 4‧19희생자 위령제를 지냈다. 
이 모임은 1961년 5‧16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5. 참고자료

1) 저서
4‧19혁명기념사업회(4‧19사랑방회 엮음), 『4‧19혁명사』, 2003
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

2) 연구논문
정창현, 「4월민중항쟁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1 

3) 잡지, 기관지 등
김행선, 「선언문과 구호로 보는 4‧19」, 『내일을 여는 역사』 23, 서해문집, 2006
박현채, 『4‧19 민주혁명과 이의 계승;민족민중론의 시각에서』, 『사상』4, 사회과학원, 1990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류덕희(서울지역대학생2)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318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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