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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동

구술자소개

구술자
노재동
면담자
이정은, 이주봉
구술일자
2010년 7월 8일
장소
서울 구술자의 사무실
구술시간
1시간 27분 28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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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 성장과정
구술자는 1941년 경남 함양에서 5남매 중 4대독자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함양이 지리산 근처이기  때문에 6‧25를 전후하여 집안의 젊은이들이 모두 희생되어, 문중에서 최초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함양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객지로 유학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지리산 골짜기였기 때문에 구술자는 어릴 적부터 좌우갈등을 경험적으로 느꼈다. 당시 함양경찰서 담장 밑에는 인민군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당시 군부대가 학교운동장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더라도 교실에서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도호국단 위원장을 지냈다. 학도호국단 경남대표로 차출되어 1958년 처음으로 서울에 와서 전방 군부대 위문을 가기도 했다. 

2) 대학진학과 대학생활
당시 서울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제2외국어를 시험 봐야 하는데, 시골에서 그것을 공부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구술자는  서울대를 포기하고 고려대 법과대학을 지망했다. 당시 농고에서 법대에 진학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구술자는 교장선생님의 배려  하에 부산에 6개월 정도 내려가 학원을 다니면서 입시준비를 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입학해서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지내기도  했다. 


3) 4‧18의 배경
구술자의 회고에 따르면, 1950년대에 이미 자유당은 1당독재를 한다고 비난을 많이 받았다. 1960년 들어와 3‧15 부정선거를 목도한 상태에서 김주열의 죽음은 국민들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공분을 자아냈다.
이런 모순 앞에서 일반 국민들도 분노를 느꼈지만, 특히 정의감에 불탔던 젊은 학생들은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면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유기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경우 민족사학에 다니는 것이 뿌듯하기는 한데, 그런  사회상을 보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들이 있었다. 당시 1학년이었지만 구술자도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학내의 분위기는 경찰의 학원 감독이 아주 심했다. 성북경찰서 형사들이 학생들로 가장해 캠퍼스에서 살다시피 하고 강의실까지 들어왔다. 학생회 간부에게는 밀착감시가 붙고는 했다. 

4) 4월 18일 당일의 상황 
4월 18일 본관 205호실에서 한기식 교수의 독일어 강좌가 있었다. 수업이 막 끝날 무렵, 인촌동상 앞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있으니 나오라는 소리에 신입생들도 호응을 하여 나갔다.
당시 구술자는 머리띠를 두르고 선발대에 서서 안암동 로터리와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갔다. 당시 학생들은  '고대'라고 쓰여 있는 머리띠를 두르고 '부정선거 다시 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는  말은 나오지는 않았다. 행진하면서는 교가, 학도호국단가, 응원가 등을 불렀다.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할 때 장택상이 나타나자 학생들은 "정치골동품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철승이 나왔을  때는 고대 선배였기 때문에 환호를 울리기도 하였다. 유진오 총장이 나와 "지금 밤이 어두워가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니까 학교로 돌아가자"라고 호소를 했다. 당시 학생회장단은 거리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박상용, 김금석 등이 구호를 선창했다. 
유진오 총장의 호소에 학교로 돌아가기로 한 학생들은 천일백화점 앞에서 깡패들을 만나 습격을 당했다. 정치깡패들은 자전거 체인,  벽돌 등을 가지고 학생들을 습격했다. 구술자도 앞쪽에 있었지만 다행히 폭행을 당하지는 않았다. 유혈이 낭자한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더 격앙되었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후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울분을 토하고 다음날을 기약했다. 

5) 4‧19 당일 상황  
4월 19일 학내는 계속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 당일 학교에 가니 제기천 둑길 위로 서울 상대 학생들, 경희대생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대광고 학생들도 경찰에 쫓겨 고대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고대도 다시 대오를 정비해 가지고 다시 나갔는데, 그날은 이미  학생 수로 제압해 버리니까 경찰도 더 이상 저지를 할 수 없었다. 
당시 지도부 내에서는 경무대로 갈 것이냐 국회의사당으로 갈 것이냐 논의가 있었는데, 국회의사당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경무대로  간 동국대와 중앙대에서는 희생이 많이 있었다. 당시 시위대는 관영언론이었던 서울신문사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6) 4‧19 당시 군부에 대한 평가 
계엄령이 발포되니까 서울인근을 사수하던 부대들이 출동을 했다. 하지만 군인들도 "정부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군 지도부는 모르지만 시민들과 접촉하는 일반 군인들은 시위대에게 적대감을 갖고 행동하기 보다는 은연중에 시민들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군 전차 위에 데모대가 올라가서 같이 시내를 질주하기도 했다. 당시 시민들은 군인들이 오면  박수치면서 환영하기도 했다. 


5. 참고자료

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2권, 1985.
고대신문사, 『고대신문 축쇄판 』3권, 1985.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4‧18 고대행동과 4월혁명을 통해 조망하는 21세기-4월혁명 50주년 기념학술대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0.
고려대출판부. 『고려대학교 100년사-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노재동(4.18고려대시위)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911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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