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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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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최순권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이주실)
구술일자
2010년 11월 15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13분 38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7년 출생 1960년 당시 단국대학교 총학생위원장으로 4월혁명 당시 단국대학교 시위 주도 등 적극 참여 1961년 4.19 1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 4.19혁명공로자회 이사 역임
구술내용 요약
최순권은 1937년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이다. 서울 숭인초등학교, 대동중학교, 대동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단국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구술자는 4‧19 참여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1년 4‧19 1주년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정부 주관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관을 해서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 때 4‧19 1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 행사에는 장면 총리, 참의원 의장 백낙준, 민의원 의장 곽상원 등 정치인들이 많이 참여를 했었고, 이를 눈 여겨 본 정치인이자 초대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에게 발탁되어 '국민의 힘'이라는 당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어 정치 입문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 한나라당 중앙위원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1962년에 4‧19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은 구술자는 이후에도 4‧19 관련단체 활동을 하였는데 4‧19혁명공로자회에서 이사로 3년간 활동하다가 올해 그만두었고, 4‧19 5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해 정치에 대한 꿈이 있어 법과로 진학했다고 한다. 1960년의 대학 분위기는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과 토론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구술자는 1960년 4월초 리더십과 주위의 추천으로 단국대 총학생위원장이 되자마자 4‧19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총학생위원장이 되는 데는 럭비부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총학생위원장 활동은 주로 학교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등록금투쟁 등을 주로 하였고, 4‧19 이후에는 정치적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4‧19 관련해서는 총학생위원장으로 대내외적으로 학교를 대표하는 활동들을 하던 중 다른 학교 학생들과도 교류가 생겨서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하는데 대학생들이 앞장서야 하지 않느냐는 식의 대화가 많이 오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구술자는 고려대, 서울대, 중앙대 등의 대학연합시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다고 증언했다. 
구술자는 주로 학교의 간부들, 즉 학도호국단 학생들과 경희대, 동국대 등지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 시위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가 오가거나 계획을 하는 데까지 논의되지는 않았던 모임의 성격이었고 4월 18일 고대생 피습사건을 알게 된 후 시위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구술자는 4월 19일 아침 단국대로 가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유도했는데 교직원들의 만류가 있었다고 기억하였다. 
구술자는 4월 19일 시위 당일에 대해 선언문 작성과 낭독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선언문이 학보사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단국대 시위 참여를 어떻게 단과대 별로, 과 별로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하지 못했다. 
당시 단국대는 교문이 없어서 학교를 나오는 데는 별다른 물리적 제약을 받지 않았고 또한 한남동은 그 때 시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참 시내로 나올 때까지 경찰의 제지 또한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단국대 시위대는 한남동에서 장충동, 퇴계로를 거쳐 시청 앞, 국회의사당에 오후 2시경 도착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하여 구호를 외치다가 동국대 학생들이 경무대 앞으로 가자는 소리를 했고 구술자도 국회의사당에서 경무대 앞으로 가 동국대생들의 시위대를 목격했다고 한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 발포가 있은 뒤 효자동 근처 한옥에 피신해 있다가 저녁때쯤 광화문으로 다시 나와 상황을 살피고 귀가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20일에도 시청 앞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단국대 학생들이 성명서를 썼고 구술자가 시청 앞에서 낭독했다고 증언하였다. 26일 이승만대통령 하야 때까지 거리시위를 했다
당시 단국대 희생자인 김성수가 부상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위문을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구술자는 1960년 4‧19 시위의 증언보다는 1961년 4‧19 1주기 준비위원장 활동을 했던 것에 증언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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