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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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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허정남
면담자
이주봉
구술일자
2010년 7월 16일
구술장소
국민체육진흥공단 구술자의 사무실
구술시간
1시간 32분 26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2년 출생 1960년 당시 고려대하교 농대 학생으로, 역도부를 주축으로 4‧18 시위 적극 참여
구술내용 요약
1) 성장과정
구술자는 1942년 여주군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님이 경찰관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여주군 내에서 자주 이사를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발발했는데, 경찰가족이었기 때문에 씨족마을인 여주군 가남면 금복리로 가서 은신 중 즉결처분의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6‧25가 끝난 후 서울 청량중학교로 진학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다시 여주로 내려와 대신중학교와  대신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

2) 대학진학과 대학생활
구술자는 농업고등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과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한 농예화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고려대를 선택한 것은 성적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구술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성적문제로 농과대학에  지원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농과대학 재학생 중에는 고등학교 학도호국단 대대장 출신들이 많았다. 또한 재학생 중에는 양조장을  경영하는 집안 출신도 약 1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에는 역도부, 유도부, 공수도부(태권도부), 검도부, 럭비부, 산악부 등의 운동부가 있었는데, 구술자는 역도부에  가입해서 재학 내내 활동을 계속했다. 구술자가 역도부에 가입한 이유는 고려대에 인적 연결망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측면과, 고려대 입학 전에 구술자는 변영태 전 외무부장관(1951.04.16~1955.07.28)의 강연을 듣고 아령으로  운동을 했었던 경험의 두 가지 측면에서였다. 당시 역도부는 고려대 본관 5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3) 4‧18 고려대 시위 배경과 전개
구술자는 4‧18 고려대 시위는 마산에서 김주열이 사망한 것과 3‧15 부정선거에 대한 울분, 그리고 일제시기부터 계승된 고려대의 전통이 어우러져 4‧18 고려대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1961년 4월 18일 당일, 역도부는 주장 김영표의 지시에 의해서 시위에 참가했는데, 구술자 역시 선배의 권유로 참가했다.  구술자는 4‧18 고려대 시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운동부였는데, 그 중에서도 역도부, 공수부, 럭비부가 선두에  섰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역도부는 4‧18 고려대 시위 이전부터 고연전에서 경비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관습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구술했다.
4‧18 고려대 시위에 있어 역도부 김영표가 구호를 만들고 정경대학 정치학회 조남조 회장이 플래카드를 작성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교외로 진출한 시위대는 대광고등학교와 신설동, 동대문을 거쳐 당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행진했다.  행진 당시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고 Auld Lang Syne의 음에 붙여 애국가를 불렀는데, 가두와 전차에 타고 있던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지지를 표시했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치 발언을 하면서 연좌시위를 전개했는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철승과 장택상이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특히 장택상이 연설할 때  손진영(정치외교학과 59학번,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학생토론대회에도 참가함)이 '정치골등품은 물러가라'고 선창하자 학생들이  제창하여 장택상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던 일도 있었다.
시위대는 유진오 총장의 회유로 일단 귀교했다. 귀교 시 선두에는 지프차가 있었는데, 지프차 위에서 독고중훈(철학과 4학년)과  김낙중(당시 농과대학 학생위원장)이 마이크를 잡고 정치 발언을 했다. 그리고 구술자는 천일백화점에서 화랑동지회 소속의 정치깡패가  시위대에 테러를 가했는데, 이것이 4‧19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4) 1960년 4월 19일의 고려대 상황
1960년 4월 19일 고려대 본관 앞에서 시위를 재개할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던 중 김옥배(정치외교학과 58학번)가  "나는 여러분들 나가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응? 가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침에 등교시간에 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학생들, 길 건너 서울상대 학생들이 나가지 않느냐. 온 서울이 다 나가려고 하는데, 나가는데 우리 고려대학이 이대로 있을 수  있느냐"고 발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교외로 진출했다고 구술자는 기억하고 있다. 4월 19일에는 경찰의 저지 없이 시위대가 행진을  했는데, 이것은 폭발적으로 증간한 시위대를 막을만한 경찰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5) 4‧19 이후 상황에 대한 구술자의 기억
구술자는 고향에서 상경하신 아버님의 권유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4월 26일 이후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상경했을 때 고려대는 중부경찰서를 담당해서 치안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후 고려대 내부에서는 고정훈 사건과 관련하여 이세기 당시 정경대학 학생위원장이 대의원대회에서 제명되는 일이 있었다고 구술자는 말하고 있다.

6) 기타
구술자는 5‧16군사정변 직후 군부세력에 의해서 진행된 특수체육(공수교육)을 받은 경험과 YTP 사건에 연루되어 역도부에서 제명되었다가 다시 복귀한 경험을 구술했다.



5. 참고자료

『4‧18 고대행동과 4월혁명을 통해 조망하는 21세기-4월혁명 50주년 기념학술대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4‧18 고대내 시발은 역도부가 주도」, 『고대역우회보』, 1990.4.
『동아일보』, 196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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