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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960년의 3.15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이나 민주당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선거였다. 58년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을 총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10석이 줄어든 126석을 차지한 반면, 47석에 불과했던 민주당은 79석으로 늘어났다. 민심이반이 심각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자유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대대적인 부정선거 준비에 착수한다.
1959년 3월에는 선거를 총괄하는 내무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했다. 최인규는 경찰과 시읍면동 공무원들에게 부정선거 지침을 하달하고 득표공작을 독려했다.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이 각각 정,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는데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치료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선거를 한 달 남겨두고 2월 15일에 갑자기 사망한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 되었으나, 문제는 부통령에 출마한 이기붕이었다.
당시 부통령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1968년 사사오입 개헌에서, 대통령의 궐위시 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하기로 규정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나이가 너무 연로하여 언제 유고상태가 될 지 알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자유당으로서는 이기붕의 당선에 사활을 걸었다.
이승만 정권은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철저하게 금권, 관권을 총동원했다. 경찰과 세무서를 동원하여 야당의원들과 운동원들을 협박, 회유했고, 야당 선거 참관인들을 몰아냈으며, 사전투표, 대리투표,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를 자행했다. 이런 사실은 한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를 민주당에게 제공함으로써 밝혀졌다.
결국 이 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발생하여 이승만 정권은 종말을 고했으며, 이기붕 일가는 권총으로 자살했으며, 부정선거의 총책이었던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