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건
더 보기사진사료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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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으로 들어서는 최하영 전 심계원장과 곽영주
등록번호 : 00734156
날짜 : 1961.05.09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증인 곽영주, 임철호, 천세붕, 이현택 등은 한결같이 최하영에 유리한 증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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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앞 발포사건 당시 피고인 곽영주의 현장검증 장면
등록번호 : 00734196
날짜 : 1961.09.05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곽영주, 유충열, 백남규 등 피고인 3명과 증인으로 8명을 출두시켜 심문했다.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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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시위 발포명령사건 현장검증 장면
등록번호 : 00732937
날짜 : 1960.07.20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곽영주의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증인들은 곽영주에게 유리하게 증언하려 했으나,...
사료 콘텐츠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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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과 대법원장 선거
요약설명 : 각 3인에 대한 지명권 등의 권한을 대법원장이 가지고 있다. 대법원장의 권한은 실로 막강하다. * '6대사건'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4.19 발포명령 사건, 정치깡패 사건, 서울·경기지역 3.15 부정선거 관련자 사건, 제3세력 제거 음모 사건, 이승만 전 대통령 저격사건이다. 1960년 10월 8일 서울지법의 6대사건 판결공판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발포명령 사건의 유충렬과 백남규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하고 그 최고책임자로 지목된 홍진기 · 조인구 · 곽영주에게 '무죄', 기타 사건 피고인들에게도 법률상의 이유를 들어 유기징역 · 무죄 · 공소기각 · 형 면제 · 집행유예를 선고했다.(10.8 판결). 이날 판결로 13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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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을 아시나요? - 4.19 혁명
요약설명 : 시위대의 물결은 권부의 심장 경무대로 향했다. 경무대에는 곽영주 경호과장의 지휘 아래 무장 경찰이 철통같은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불과 10미터로 압축된 순간, 마침내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7, 8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러나 정의에 불타는 젊은 사자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동성고의 고교생들은 교모 턱끈을 걸고 맨몸으로 돌진하였고, 동국대, 연세대 등의 대학생들도 어린 후배들의 죽음 앞에 필사적으로 맞섰다. 이날 경무대 앞 죽음의 행진은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구술 컬렉션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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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정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김민철, 강동민)
일자/장소: 2010년 9월 16일, 9월 30일/구술자의 사무실
요약설명 : 상황에서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곽영주의 주 책임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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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이준식, 조세열, 강동민)
일자/장소: 2010년 7월 20일, 9월 27일/구술자의 사무실
요약설명 : 1) 송요찬 참모총장의 비서가 되기까지 1931년 대구에서 출생한 구술자는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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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송웅
면담자 : 현대사기록연구원(박정수, 박재홍)
일자/장소: 2010년 7월 26일/양평 구술자의 자택
요약설명 : 구술자인 설송웅은 4‧19 직전에 당시 고등학생 연합모임인 협심회를 만들고 주도했던...
일지사료 7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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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내무부장관 취임 후 총경 임명 현황
일자 : 1959.12.12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부정선거의 진행과 정부·여당
요약설명 : 최인규내무부장관은 1959년 3월 20일 취임한 이래 12월 12일까지총 167명의 총경 중 20%가량을 새로운 인물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치안국이나 서울시경 소속의 승진 관례를 깨고 70%에 해당하는 23명을 지방출신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2일 이성우내무부차관은 이강학 치안국장, 유충렬 경찰국장, 경무대곽영주경무관 등과 함께 경찰수뇌 회의를 열고 총경급 이동 문제 등 치안 문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조선일보』1959. 12. 13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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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구 치안국장, 임화수 방문 받아
일자 : 1960.4.18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정부·여당과 친여세력
요약설명 : 단장 임화수가 조인구치안국장을 방문하였다. 이에 대해 조 치안국장은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며, 앞서 일본 동경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 갔다 온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고만 말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치안국 소식통에 의하면 이날 밤 임화수와 유지광이 치안국에 나타나 임화수 혼자만 치안국장실에 들어갔으나 마침 국·과장회의가 열리고 있던 중이라 별말 없이 돌아간 일이 있다고 한다. 또한 곽영주 경무관은 조 치안국장에게 임화수 일당을 입건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청탁을 하다가 치안국장으로부터 “당신이 치안국장의 부하냐, 상관이냐?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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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임시 국무회의에서 학생시위 수습책 논의
일자 : 1960.4.18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정부·여당과 친여세력
요약설명 : 파급되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새로운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날 오후 5시부터 4시간에 걸친 국무회의를 마친 당국자는 “우선 질서를 잡아 놓은 다음에야 잘잘못을 따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시위 진압을 위해 강경책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였다. 국무회의 도중 홍진기내무장관은 경무대를 방문하고 사태진전에 관해 보고하였다. 또 이승만대통령 경호담당 곽영주경무관은 국무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중앙청을 방문하였다. 국무회의가 끝난 다음 김정렬국방장관은 약 1시간여에 걸쳐 제6관구사령관과 회합하였다고 하는데 무엇이 논의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서울신문』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