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8건
더 보기사진사료 2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3건
더 보기-
한일협정이 남긴 것들
요약설명 :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목숨 바쳐 싸웠던 독립투쟁을 한갓 무위로 만든 그 회의는 철저하게 미국의 전후 세계 재편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에게 극동지역의 안보를 맡기기 위해서 한국을 일본 경제의 배후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본도 경제 호황과 성장으로 생기는 과잉생산물의 처리장으로서 한국이 필요했다. 게다가 정권유지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은 일본에 ‘도움’과 ‘원조’를 구걸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한국 정부의 ‘재산권과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한-미-일 정권의 이해관계가 삼위일체로 맞아 떨어진 결과가 한일협정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오히라...
-
박종철고문치사사건 - 진실이 힘이다
요약설명 : 사건을 축소해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수사관들을 시켜 시신을 경찰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할 수 없이 고문치사 사실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조차 “고문 경관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두 사람뿐”이라며 진실을 축소했다. 두 경관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 수감하는 과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경찰은 승합차 안에 똑같은 방한복을 입은 10여 명의 경관을 앉혀놓고 누가 고문 경관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연막을 쳤다. 삼류 희극보다 못한, ‘잘못된 동료 감싸주기’의 작태는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17일자 《동아일보》에 오연상의 기사가 실리면서 사인(死因)이 밝혀...
-
사람.인 Ⅳ
요약설명 : 성유보, 박경리, 이태영, 안병무, 김수환, 이돈명, 장일순, 박영숙, 강은기, 백남기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그리운 사람.인 사진 출처: 토지문화재단, 무위당기념관, 백남기투쟁본부
구술 컬렉션 3건
더 보기-
이경국
면담자 : 송철원
일자/장소: 2019. 9. 2 / 원주 무위당기념관
요약설명 : 무위당 장일순과 김영주는 체포되었고, 4.19혁명에 가담했던 구술자는 입대하였으나...
-
김상범
면담자 : 이상훈
일자/장소: 2019.11. 11/원주영상미디어센터 스튜디오
요약설명 : 퇴사,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과 에피소드, 무위당 장일순과의 만남과...
-
정인재
면담자 : 이상훈
일자/장소: 2019.9.27(1차),10.5(2차)//원주영상미디어센터 스튜디오
요약설명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부산미문화원사건 당시 최기식 신부와 이창복, 구술자의...
일지사료 12건
더 보기-
송요찬 계엄사령관, 이승만 대통령에 최초 진언
일자 : 1960.4.20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군
요약설명 : 송요찬 사령관은 20일 오전 9시, 경무대로 이승만대통령을 찾아가 최초의 진언을 하였다. 평화적인 사태 수습을 위해 학생대표들을 만나 그들의 요구를 듣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었다. 이는 지난 밤 조재미 사단장이 시위군중 대표들과 국무위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다 무위로 돌아간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학생들과의 만남을 응낙하자 송 사령관은 조 사단장에게 대표자 5명을 선정하여 대기시킬 것을 지시하였으나 끝내 아무 소식이 없어 무산되었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40쪽
-
자유당, 장면 부통령 사퇴에 “만기 앞둔 사임 흥미 없다”논평
일자 : 1960.4.23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정부·여당과 친여세력
요약설명 : 자유당 선전위원장 조순 의원은 23일 장면부통령의 사임성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무위(無爲)와 정부비난의 연속이었던 장 부통령의 임기 4년이 종료되어가는 이때에 그사임은 아무 흥미조차도 없으며, 그 이유를 4·19사건에 결부시킨 것은 비열한 일이다.『조선일보』1960. 4. 23 석1면
-
검찰, 자유당 총무위 경리 인규진·이기붕 비서 전영배 소환
일자 : 1960.5.11
분류 : 혁명입법과 혁명재판
요약설명 : 총무위원장의 혐의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960. 5. 11 석3면 ; 『동아일보』 1960. 5. 12 조3면 또한 검찰에서는 고 이기붕이 국회의장으로 재직 시 비서였던 전영배를 소환하여 이기붕의 혐의에 대한 부분을 심문하였다.『조선일보』 1960. 5. 11 석3면 전영배는 이기붕의 경리비서까지 맡은 사실을 시인하고 자유당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치자금이 일단 이기붕에게 보고되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또 때때로 기업주들이 직접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박용익(전 자유당 총무위원장)이 전담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한편 이용훈 검사는 오후에 다시 인규진을 소환하여 정치자금 관계를 세밀히 심문하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