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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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속보
등록번호 : 00553367
날짜 : 198*.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YMCA전국연맹
요약설명 : 진 또하나의 젊은피 1.학원 악법 철회하고 학원탄압 중지하라 2.민주개헌 실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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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야! 너를 우리들 가슴에 묻는다!
등록번호 : 00865329
날짜 : 1992.05.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요약설명 : - 김철수열사 분신 1주기에 부쳐 살인적인 입시교육, 이제 우리가 먼저 일어서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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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선언문[전두환 정권의 연세대 정책 관련]
등록번호 : 00961447
날짜 : 198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연세대학교
요약설명 : 진주해 있는 전두환 일당의 앞잡이 약 10개 기관의 철수, 휴강되고 있는 모든 수업의...
사료 콘텐츠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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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 - 허병섭 목사
요약설명 :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꼬방동네는 정부가 도시개선을 명목으로 시작한 무허가 건물 철거사업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셋방이나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철거 이후에 보상은커녕 그냥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허병섭은 공동주택조합을 만들어 연립주택을 짓는다는 계획서를 작성하여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망치와 곡괭이를 든 철거반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너져가는 판잣집에 깔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판자촌 사람들의 통곡에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허병섭은 철거반원이 허물려고 하는 세탁소 건물 벽에 대자로 붙어 서서 외쳤다. “이놈들아.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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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노동자대투쟁 - 울산 현대중공업
요약설명 : 경찰은 울산시내로 넘어가는 남목고개에 진을 치고 행진을 막으려 했다. 노동자 대표가 일단 노동자들을 도로 위에 앉히고 경찰서장과의 담판에 나섰다. “길을 터주십시오. 우리가 흥분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꼭 샌딩머신의 위력을 보시겠습니까?” 샌딩머신은 고압으로 모래를 뿜어 철판의 녹을 제거하는 기계로, 시위대의 맨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실상 분사된 모래알은 몇 미터만 날아가면 힘을 잃어 먼지바람이 되고 만다. 게다가 정문에서 경찰들에게 겁을 주려고 시범을 보이느라 압축공기를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경찰은 긴장하고 있었다. 노동자대표는 다그쳤다. “꼭 여기서 제2의 광주사태를 맞아야겠습니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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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의 증언
요약설명 : 진 고문을 가했다. 뒤늦게 사북항쟁은 회사와 어용노조, 이를 묵인한 정부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재조명됐다. 오픈아카이브에서 사북항쟁 관련자 구술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1980년 4월 초, 어용노조와 임금 인상 문제로 시작된 동원탄좌 노조시위는 경찰의 개입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시위로 발전했다, 22일 오후 시위대와 대치하던 경찰은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시위대는 사북읍을 장악했다. 참여자 안원순의 구술이다. 사북항쟁 이전의 사북탄광 실태와 노조지부장 선거에 대한 증언을 통해 왜 사북항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구술 컬렉션 1건
더 보기일지사료 1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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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일부, 이기붕 집 앞까지 육박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 4·19데모 수기」,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23-524쪽. 동양극장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심한 타박상을 입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고,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그로 인해 동양극장이 많이 파손되었다. 오후 4시 반 경, 서대문 일대는 완전히 교통이 차단되었고, 경찰관들의 발포소리만 요란하였다. 경찰이 발포를 계속하고 수 명의 사상자가 나오자 시위대는 오후4시 반쯤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러나 저녁 7시, 이기붕 집 앞과 충정로 일대에서는 경찰들이 통금시간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는 군중 속에서 학생만을 골라 허리띠를 끌러 양 손을 묶고 곤봉이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난타한 뒤 연행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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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서울 입성
일자 : 1960.4.19
분류 : 정치·사회 상황 > 군
요약설명 : 2진 코스로 운행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서울운동장 주변의 무장시위대는 진압되지 않은 성북경찰서 근처의 시위대원들과 합류하여 장시간 성북경찰서를 습격할 수있었다. 이들은 중앙청으로 갔던 부대가 다시 3대의 탱크와 더불어 성북경찰서로 전진해서야 대체적으로 진정되었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38쪽. 군은 이와 같은 혼란이 온 이유가 경찰의 끊임없는 구조요청의 비명과 부정확한 보고와 정보, 그리고 사태의조기수습을 위한 현지 파견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초래된 것으로 보았다. 자정 무렵, 15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20일 새벽 2시 경,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사태가 일단락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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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이기붕 집 앞에 모인 시민들, 집 안으로 돌입
일자 : 1960.4.26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 25일 밤까지 이곳을 경비 중이던 군대는 서대문 네거리로 철수한채 원형으로 수비진을 치고 시위대와 시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약 100미터 떨어져 있는 서대문로 터리에 군대가 약 2개 소대 가량 진을 치고 있을 뿐, 이기붕의 집에는 일가족은 물론 지키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9시 반 경, 시위대의 선두는 무방비상태이며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이씨 집으로 돌입, 문 앞에 세워진 지프차한 대를 밀고나온 후 50-60명가량이 실내에 난입했다. 그들은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품을 하나씩 들고 집 앞 전차 길까지 나와 성냥을 그었다. 집 안에서는 첫물 수박이 나오는가 하면 호피와 인삼·설탕·양탄자·침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