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8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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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노조자료-노동운동의 횃불
등록번호 : 00875766
날짜 : 1977.09.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고 전태일열사의 분신사건이후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어머니 이소선여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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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 선거관리 위원회 제1차 회의록
등록번호 : 00876111
날짜 : 1977.06.0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투쟁을 전개해나감. 이 과정에서 전태일열사의 분신사건이 있었고 청계피복노동조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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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 선거관리 위원회 제2차 회의록]
등록번호 : 00876115
날짜 : 1977.06.2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투쟁을 전개해나감. 이 과정에서 전태일열사의 분신사건이 있었고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사료 콘텐츠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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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영혼, 조영래 변호사
요약설명 : 전환점을 가져다준 전태일의 죽음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스물두 살의 재단사 전태일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그는 불길 속에서 쉼 없이 외쳐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숯처럼 까맣게 된 전태일은 목숨이 꺼져 가는 순간에도 한 손에 근로기준법 책자를 쥐고 있었다. 빈소로 찾아간 조영래는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보며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국 사회에 노동자의 존엄한 권리문제를 근본적으로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영래의 삶의 행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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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시다 - 신순애 이야기
요약설명 : “전태일이 분신했던 그 날도 저는 미싱을 돌리고 있었어요. 사장이 그러더군요. 저기 청계천 어디서 깡패 하나가 죽었는데, 행여 구경한다고 나가지 말라고. 저는 그 소리 듣고 그런가보다 했어요. 진짜 구경도 안 나가고 일만 했으니까요.” ‘깡패’ 전태일 신순애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태일, 아니 1970년대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전태일. 그의 죽음 바로 곁에 있었던 미싱사 신순애는 정작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그 후 검정고시 준비를 무료로 시켜준다는 말에 노동교실에 등록했고, 그제서야 그 노동교실이 바로 전태일의 죽음 덕분에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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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의 죽음과 1991년 봄 투쟁-“ 젊은이들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나무”
요약설명 : 번져나가 더욱 분노를 일으켰다. 잇달아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전남대 윤용하가 분신하였고 성균관대 여학생 김귀정이 시위도중 경찰에 쫒기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걷잡기 힘들게 되었다. 5월 9일에는 전국에서 55만 명이 집회에 참가하는 등 6월항쟁이 재현되는 듯 했다. 사태는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가해자들을 구속시키고 책임자들을 해임시키면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원식 국무총리가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맞는 장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학생들을 패륜아로 몰아간 영향도 있었다. 또한 분신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다른 사람이 써주었다고 매도함으로서 여론을 돌린 것도 작용했다. ...
구술 컬렉션 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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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범
면담자 : 신동호
일자/장소: 2016.7.14./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이후 활동, 수도경비사령부 병력 고대 난입 고대생 구타사건,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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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면담자 : 차성환
일자/장소: (1차) 2023.7.10. (2차) 2023.7.11. (3차)2023.7.12. /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 사무실
요약설명 : - 전교조 서울지부장 출마와 낙선 - 강경대 사망 사건과 분신 정국 - 명동성당 농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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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면담자 : 신동호
일자/장소: 2019. 8. 13 / 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중에 전태일분신사건이 일어났다.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와 장기표는 삼일다방...
일지사료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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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교 성직자 및 재야인사 15명, 청계노조 폭력 탄압 규탄문 발표
일자 : 1977.9.20
분류 : 민주화운동 > 노동
요약설명 : 수 없을 것입니다. 피를 흘리며 전태일의 뒤를 이어 죽어가는 이 근로자들의 외침을 막기 위해 경찰은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농성을 풀고 피투성이가 된 근로자들이 밤 10시경 교실 문을 나서자 경찰은 53명 전원을 연행해 가서 5명을 구속시키고 3층에서 뛰어내려 병원에 입원한 근로자는 불구속 입건하고 9명은 구류 15일을 때려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소위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현 정부가 인간 최소한의 몸부림을 치는 나이 어린 근로자에 대해 행한 처사입니다. 전태일 한 사람의 목숨으로도 모자라 또 많은 근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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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생 1,000여명, 「6월 민족선언문」 낭독 후 시위
일자 : 1979.6.25
분류 : 민주화운동 > 학생
요약설명 : 이제 전 민족의 목숨마저도 자기들 손안에 넣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인류역사의 어느 부분을 찾아보아도 외세에 의존하고, 관료독점재벌을 비호하며 국내 민중을 억압하던 체제가 진정한 안정, 총화,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기록은 없다. 불법적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시작된 졸속한 경제개발은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 피폐를 조장, 여기서 배출된 과잉인구를 바탕으로 저임금의 기틀을 마련했고,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 일관 생산자인 민중을 소외시키고 해외자본과 권력과 결탁한 일부 독점재벌을 부양했을 뿐이다. 70년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고전태일 열사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78년 인분을 뒤집어쓴 동일방직 여공들의 울먹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