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10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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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스크랩] 사설 학생신분과 사회정의와 전태일씨 자살사건 신민 특조단구성 관련기사
등록번호 : 00444990
날짜 : 1970.11.23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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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공연단 사건 진상조사단 구성 및 진상조사 요청의 건[수신:전태일기념사업회,발신:아...
등록번호 : 00890274
날짜 : 2002.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관한 전체적 설명.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가 주도하고 공대위 대표 박석운이 발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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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사업회에 대한 탄압책동을 즉각 중단하라!
등록번호 : 00169781
날짜 : 1989.11.16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제작한 전태일동지 추도 포스터와 함께 발견되어 이 둘의...
사진사료 2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1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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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영혼, 조영래 변호사
요약설명 : 전태일은 목숨이 꺼져 가는 순간에도 한 손에 근로기준법 책자를 쥐고 있었다. 빈소로 찾아간 조영래는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보며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국 사회에 노동자의 존엄한 권리문제를 근본적으로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영래의 삶의 행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71년 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장기표와 더불어 이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에게 장기표가 두툼한 노트를 건네주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서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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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의 6월민주항쟁
요약설명 : ‘시국수습 8개 조항’이 반독재투쟁 전선을 분열시키고 앞으로도 민중투쟁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저의를 가지고 있음에 대해 경고했다. 노태우의 6.29선언 직후 이루어진 독일의 7월 4일 대회는 국내에서 시작된 6.10민주항쟁의 드높은 파도가 해일이 되어 멀리 유럽에 사는 동포들을 덮친 사건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동포 집회였으며, 유학생들이 그간의 침묵을 깨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서도 국내의 6.10민주항쟁에 연대하는 활동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에 항의하며 고문 근절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동경, 오사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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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시다 - 신순애 이야기
요약설명 : “전태일이 분신했던 그 날도 저는 미싱을 돌리고 있었어요. 사장이 그러더군요. 저기 청계천 어디서 깡패 하나가 죽었는데, 행여 구경한다고 나가지 말라고. 저는 그 소리 듣고 그런가보다 했어요. 진짜 구경도 안 나가고 일만 했으니까요.” ‘깡패’ 전태일 신순애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태일, 아니 1970년대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전태일. 그의 죽음 바로 곁에 있었던 미싱사 신순애는 정작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그 후 검정고시 준비를 무료로 시켜준다는 말에 노동교실에 등록했고, 그제서야 그 노동교실이 바로 전태일의 죽음 덕분에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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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청년협의회 등 150명 시위, “노조운동하다 숨진 김진수 씨 사인 밝혀라”
일자 : 1971.6.25
분류 : 분류없음 > 기층민중
요약설명 : 등 4개 청년단체 회원 150여 명은 동료 노동자의 드라이버에 찔려 입원 중 5월 16일 숨진 영등포구 오류동 한영섬유 종업원 김진수 씨의 장례를 마친 후 김 씨의 죽음은 제2의 전태일사건이라고 주장, 당국과 경영자 측은 진상을 철저히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30여 분간 세브란스 병원 앞길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가족들은 김 씨가 노조운동을 하다 지난 3월 18일 공장장의 사주를 받은 동료 종업원에게 맞아 결국 숨졌다고 주장해왔었다. 한편 김 씨의 장례는 숨진 지 40일 만인 이날 오후 3시 치러졌다.『동아일보』 1971.6.26. 7면; 『경향신문』 1971.6.26. 7면. 자유의 종은 장례식 참가자 수를 300명이라고 보도했다. 『자유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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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대령 등 내란음모 첫 공판
일자 : 1975.1.24
분류 : 정치·국제관계 > 국회·사법부
요약설명 : 전 고려대 ROTC단장을 역임한 예비역 대령 이태일(49·육사8기) 피고인과 민강필(25·무직), 홍의선(26·무직) 피고인의 내란음모사건 및 방송작가 김병형(46·육사8기·예비역 중령) 피고인의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24일 오전 서울형사지법 6부(재판장 황석연 부장판사) 심리로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공소장에 따르면 이태일, 민강필, 홍의선 세 피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정부 전복을 꽤했으며, 무장결사대를 조직해 중앙청을 점거한 뒤 과도정부를 거쳐 총선거에서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모의했다. 이에 대해 이태일 피고인은 민경필 피고인과 다방 등지에서 만나 취직문제를 논의하면서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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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교 성직자 및 재야인사 15명, 청계노조 폭력 탄압 규탄문 발표
일자 : 1977.9.20
분류 : 민주화운동 > 노동
요약설명 : 수 없을 것입니다. 피를 흘리며 전태일의 뒤를 이어 죽어가는 이 근로자들의 외침을 막기 위해 경찰은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농성을 풀고 피투성이가 된 근로자들이 밤 10시경 교실 문을 나서자 경찰은 53명 전원을 연행해 가서 5명을 구속시키고 3층에서 뛰어내려 병원에 입원한 근로자는 불구속 입건하고 9명은 구류 15일을 때려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소위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현 정부가 인간 최소한의 몸부림을 치는 나이 어린 근로자에 대해 행한 처사입니다. 전태일 한 사람의 목숨으로도 모자라 또 많은 근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