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동맹휴학사건'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15건
-
문서사료 1건
-
사료 컬렉션 1건
-
사료 콘텐츠 2건
-
- 한국 지성사를 풍미한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
요약설명 :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할 만큼 리더십도 뛰어났다. 이듬해 광주 서중에 합격한 그는 독자적으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고 민애청 학년위원(1학년 조직책)에 선임돼 시위 및 삐라 살포와 횃불투쟁 등을 이끌어 나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열일곱 살의 박현채는 빨치산으로 입산해 광주지구 부대원이 되었다. 이때 지리산에서 만난 광주서중 교장 박준옥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으며, 스무 살 미만으로 구성된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뽑혀 활동했다. 2년 뒤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체포된 그는 화순경찰서에 갇혔고, 부모님의 온갖 노력 끝에 석방되었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소년 전사인 조원제의 모델로...
-
- 민청학련사건 - “사형선고를 받아 영광입니다!”
-
요약설명 : 등 주요대학으로 번져나갔다. 단과대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동맹휴학도 잇달았다. 이에 정치권과 재야운동도 가세했다. 12월에는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어 본격적인 유신철폐운동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해가 바뀐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토론을 금지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민주화요구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긴급조치 1호가 내려진 지 이틀 후인 1월 10일, 서울대생 유인태의 집에 이철, 나병식, 서중석 등 열 명 가까운 대학생들이 모였다. 지방대학을 대표해서 올라온 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대학이 개강하는 3월부터 대학별로...
-
-
구술 아카이브 1건
-
일지사료 10건
-
- 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
일자 : 1960.3.8
분류 : 시위 상황 > 대전
요약설명 : 위해 애를 썼다. 경찰은 오후 7시 30분 경 시위 주모자를 제외한 학생을 모두 석방했다며 사건을 표면상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주모학생 5명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데모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어느 당의 사주를 받은게 아닌가”, “공산당 스파이의 조종을 받았는지”등의 취조를 당하며 배후에 대해 추궁을 받았다.대전고등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182-187쪽 한편 이날 오후 전장한 충남경찰국장은 형사상으로 학생들을 처벌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전고 학생 시위가 서울 모 계통의 지령 하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배후관계를 계속 추궁할 것이라고 밝혔다.『서울신문』도 충남경찰국장의 말을 인용해,...
-
- 안동고등학교 학생들, 교사·운영회 간부들의 학생 하복지 값 착복사실에 동맹휴학 돌입
-
일자 : 1960.6.13
분류 : 학생의 민주화운동
요약설명 : 13일 오전 9시경, 안동고등학교 학생 800여명이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 사건은 교사와 운영회 간부들이 학생 1인당 낸 하복지하복지(夏服地)는 여름철 옷감을 말한다. 값 3천환 중 100환을 공제해 착복한 사실을 알고 이를 규명하려던 학생 일부를 교사들이 폭행하면서 발생하였다. 학생들은 전체 교사들을 교실 밖으로 강제 축출한 뒤 격문을 뿌리며 시위하였다.『동아일보』 1960. 6. 14 석3면
-
- ‘민족자주통일 촉진회’조직 발기
-
일자 : 1960.8.20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통일운동
요약설명 : 시기에 이종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간부들이 서울로 올라왔고, 민족건양회의 이종률·박진·문한영 등과 천도교계 인사 박래원 등이 중심이 되어 민자통을 조직하게 되었다(이종률, 『민족혁명론』, 들샘, 1989, 232쪽 ; 『김상찬 수고』, 2쪽(김지형,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조직화과정」, 『역사와 현실』 21호, 1989, 141쪽에서 재인용)). 인사 이종률이종률은 1925년 5월초 조직된 최초의 사회주의적 학생단체인 공학회(共學會)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우리말사건·전국학생동맹휴학 옹호동맹사건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 등을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 당하였다. 이후 1946년 1월 민족건양회를 창립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