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박태순'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7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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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사료 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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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순이 이창언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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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176719
날짜 : 1989.10.2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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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한민족 청년대회 참가자 명단[수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의연구소 조준형 간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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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383235
날짜 : 1993.06.28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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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목사가 박용길장로와 박태순선생에게 보내는 옥중 서신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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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827194
날짜 : 1990.09.09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박용길
요약설명 : 박태순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제209신)으로 북쪽에서 뭔가 새로운 제안을 할꺼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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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료 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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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박태순 열사 추모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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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61177
날짜 : 미상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한신대학교
요약설명 : 故박태순 열사의 추모비를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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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故 박태순 열사 추모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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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61178
날짜 : 2001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한신대학교
요약설명 : 한신대학교 민주열사 故박태순 열사의 2001년 추모제 진행모습을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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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순 열사 10주기 추모행사에 나온 한신대 몸짓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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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61179
날짜 : 2002.08.25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한신대학교
요약설명 : 박태순에 대한 10주기 추모제가 교내에서 열린 모습으로, 학생들로 구성된 몸짓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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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사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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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콘텐츠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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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은 칼보다 강하다 -민주화를 향한 문인들의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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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제1호는 헌법에 위반된다.] 1974년 11월 15일 고은·신경림·백낙청·염무웅·조태일·이문구·박태순·황석영 등은 모임을 갖고, 이러한 유신 독재치하에서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새로운 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11월 18일 세종로 시위 도중 선언문을 발표할 것을 결정했다. 염무웅이 작성한 이 선언문은 이틀만에 무려 101명의 서명을 받아내어 11월 18일 오전 10시 무렵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인사 30여 명이 광화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 앞에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이후 시국 관련 구속 문인들의 석방, 언론ㆍ출판ㆍ집회의 자유를 촉구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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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들불처럼 번진 유신헌법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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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했다. 1월 7일에는 이희승 · 백낙청 · 이호철 · 박태순 등 문학인 61명이 지지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와중에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격노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1월 8일, 제1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발표했다. 개헌지지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사태를 진압할 초강수를 두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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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실천문인협의회 - 표현의 자유를 온 몸으로 외친 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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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박태순이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100명도 좋지만 101명이면 더 좋겠는데…….” 그때 전화로 서명에 가담한 사람이 작가 이문구였다. 이문구의 동참으로 선언문의 이름은 〈문학인 101인 선언〉이 되었다. 이 선언문을 시인 양성우가 밤새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등사기를 긁어 인쇄했다. 1974년 11월 18일 오전 9시 50분,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으로 고은, 이호철, 조태일, 양성우, 조해일, 조선작, 송영, 염무웅, 최민, 황석영, 한남철, 백낙청, 이시영, 송기원, 윤흥길, 이문구, 박태순, 김연균, 백도기, 임정남, 김국태, 석지현 등 30여 명의 문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 모습을 2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하는 가운데 자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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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아카이브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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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사료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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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대회 거행, 통일방안 등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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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1.2.25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통일운동
요약설명 : 없다”며 민자통 중앙위 운영에 필요한 재정의 상당부분을 후원하였다고 한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1991, 까치, 114쪽. ; 「문한영의 증언」, 1995. 1. 29, 서울 종로 솔바람다방(김지형, 앞의 논문, 143쪽에서 재인용)).·박래진·박진·함석희·조문태·이흥로 및 지방대표자 4명을 선출해 구성하였다.『경향신문』 1961. 2. 25 석1면 ; 『민족일보』 1961. 2. 26 1면결의문민족의 핏줄기가 끊어진 채 참담한 16년을 경과하였다. 우리는 이 이상 더 강대국의 세력쟁탈의 제물이 될 수는 없다 통일만이 살길이란 민족의 고함소리는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전민족의 총역량을 한 군데 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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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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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3.10.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민족자본을 침식, 예속시켜 매판자본화 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의 기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고 하여 신제국주의라는 시각에서 한국이 처한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했다. 민비연의 학생들은 이후 한일회담반대투쟁과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 비민주적 행위를 규탄하는 항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비연은 1965년 9월 16일 정부에 의해 공식 해체되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08~409쪽. 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1991, 173쪽. 제1차~제3차 민비연 사건은 별도의 Box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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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필,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에서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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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3.11.5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정부·여당·군
요약설명 : 그룹이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결국 김종필과의 토론회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민비연 주최로 11월 5일 개최되었다. 토론내용은 민족주의, 남북통일문제, 경제개발 5개년계획, 한미관계, 한일관계 등 시국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 토론이 끝난 후 김종필은 대학생들에게 당했다고 하면서 이런 행사를 갖게 된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하며, 박정희로부터 불신과 의혹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학생들은 5·16 쿠데타의 허구성을 폭로시키겠다는 의도를 관철시키기보다 도리어 그에게 말려드는 결과를 초래한 점이 있으며, 역부족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1991,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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