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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성

구술자소개

구술자
정지성
면담자
정호기, 양라윤
구술일자
2023.8.23.
장소
청주시
구술시간
2시간 48분 2초
구술아카이브 > 1970년대 민주화운동 > 유신 후기 지역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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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정지성은 1959년 9월 충북 괴산군에서 출생했다. 중학교까지 괴산군에서 공부하고, 청주고를 졸업했다. 청주고에는 문학서클과 독서회 등이 조직되어 활동했으나, 정지성은 참여하지 않았다. 1977년 2월 충북대 인문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충북대는 대학의 체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로, 농대, 공대, 사범대, 약학대 정도였고, 인문사회학부가 막 창립되었다. 충북대에서는 1977년에서 1978년으로 바뀌는 겨울에 비밀 독서회들이 생겼다. 교수의 제안으로 1979년 3월 ‘미래문제연구회’와 ‘국제문화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정지성은 1979년 5월 행정학과 학생 대표로 선임되었다. 충북대는 1979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시위를 준비하던 중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했다. 11월 24일 YMCA 위장결혼식에 참가했다가 연행된 학생들이 있었다. 1970년대 청주에서는 청주산업교회와 청주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 중요했고, 두드러졌다. 충북에서는 KSCF가 이제 막 결성되어 영향력이 미흡했다. 1980년에 ‘기독교사상연구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이 민주화의 봄 국면에 앞장섰다. 농민운동, 빈민운동, 종교운동의 흐름은 있었으나, 야학운동은 없었다. 1980년 5월 충북대에서도 시위와 농성이 전개되었으나, 1970년대에 제적된 학생이 거의 없어 관련 조직은 결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써클연합회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고, 총학생회는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그룹에서 당선되었다. 청주에서는 5월 13일과 15일에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15일의 사건이 컸다. 이것은 5월 9일부터 12일까지 교문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여 조성한 분위기의 결과물이었다. 이 일로 3관구에 있는 합동수사단으로 연행되었다. 3관구에는 50여 명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재판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80년 9월에 개교하고, 1981년 2월에 졸업했다. 충남대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로 충북대 학생운동에 관여했다. 1983년에 입대했고, 보안대 조사를 받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85년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이후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 충북 괴산에서 출생, 가족사, 박정희에 대한 인식, 청주고등학교의 분위기

- 1977년 충북대 인문대 입학, 1970년대 전반기 충북대 민주화운동과 윤석위

- 충북대 문학동아리 미운오리새끼, 1978년 5월 충북대의 분위기

- 1979년 3월 충북대에서 미래문제연구회와 국제문화연구회 결성

- 1979년 5월 행정학과 과 대표 선임

- 1979년 11월 24일 YMCA 위장결혼식사건에 참여했다 연행된 충북대 학생들

- 1970년대 청주산업선교회, 청주제일교회의 활동과 역할, 충북 KSCF

- 충북과 관련된 민청학련 인사들

- 1970년대 충북의 재야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노동운동

-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 충북대 상황, 청주대의 상황

- 1970년대 충청권 교류는 거의 없음

- 1970년대 청주지역 민주화의 분위기

- 1980년 충북대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충북대 시위와 농성

- 1980년 5월 항거와 관련자 연행

- 1980년 9월 개교 이후, 1983년 5월 입대, 보안대 조사

- 1985년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 관여와 그 이후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23_유신 후반기 민주화운동_구술자료 상세목록_정지성.pdf 13347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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