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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중

구술자소개

구술자
조용중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8월 10일
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39분 1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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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동국대를 다니다가 6‧25가 나서 학업을 다 못하고 신문사에 들어갔다. 자유신보 등 많은 곳에 옮겨 다니다가 4‧19  전에 조선일보에 스카우트돼 정치를 담당하게 됐다. 구술자가 유석 조병옥 선생과 집안이고 어른끼리 가까이 지내서 민주당 구파를  담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는 여당과 야당은 나눴지만 계파로까지 담당을 나누지 않았다. 신‧구파 싸움이 심했고 언론사도  조선일보는 구파 신문, 동아일보는 신파 신문,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민주당 구파는 속으로는 신파인 장면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바라지 않았다. 3‧15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유독  마산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 것은 전해에 있었던 진주시장 부정선거 경험과 민주당으로 당선된 허윤수 의원이 3‧15 선거 직전에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데 대한 야당도시 마산 시민의 분노가 컸던 것이 도화선이 된 것 같다.
3‧15마산사태 후 국회조사단을 따라 부산을 거쳐 마산에 갔다. 부산에서 오제도 검사가 기자단에 밥을 사며 마산 시위의 배후에  5열이 있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도 특무대에 근무한다는 초등학교 동창이 찾아와 '5열의 소행이니까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3‧15 선거 전에 민주당 경남도당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 거부 투쟁을 하겠다고 한 기사를 쓴 것은 민주당 경남 쪽 선거  책임자인 황남팔 의원의 말을 듣고서다. 김주열 시체가 떠오르고 난 뒤에는 정치권과 정치부 기자 사이에 '아, 이제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퍼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직전에 장면 부통령이 사임한 것은 악수 중의 악수였다. 이승만‧이기붕 당선자의 사퇴를 압박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판을 잘못 읽은 것이다. 그 당시에도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학생 시위, 미국의 압력, 그리고 당과 내각 등 이너서클로부터의 고립, 이 세 가지가 ‘삼각파도’처럼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미국의 압력이 아닐까 싶다. 
4월혁명은 이승만을 비롯한 집권세력이든 저항을 한 학생과 야당 세력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고, 아무 준비가 없었다. 조봉암과  조병옥, 성은 다르지만 두 조씨가 살아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장면은 능력도 장악력도 집념도 없는 사람이다.


5. 참고자료

조선일보 1960년 3월 1일 ~ 1960년 4월 30일자
조용중, 비주류 풍운기자 방랑기,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 관훈클럽
조용중, 끝까지 저항한 이승만이 물러나기까지, 『관훈저널』 2010년 여름호, 관훈클럽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조용중(기자, 언론인)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994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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