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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최서영
- 면담자
-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 구술일자
- 2010년 8월 13일
- 구술장소
-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 구술시간
- 1시간 46분 58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33년 출생 1957년 서울신문 입사 1960년 4월혁명 당시 서울신문 기자
- 구술내용 요약
-
구술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 정문회라는 문학서클과 신진회라는 이념서클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4학년 때 류근일의 필화로 인한 신진회 사건을 겪었다. 서울문리대 신진회, 서울법대 신조회, 고려대 협진회가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처럼 비쳐져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는 등 고생을 좀 했다.서울신문 공개채용에 합격해 법조 출입을 하면서 견습을 했다. 조봉암 진보당 사건을 취재했다. 1959년 국방부에 출입하기 시작했는데, 1년 후에 4월혁명을 맞았다.당시 우리 군은 만주군관학교 출신, 광복군 출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학병 출신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데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양적으로 급팽창한 까닭에 질이 많이 떨어졌다.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사심이 없는 한신 장군을 육군본부 감찰관으로 임명해 숙군작업을 하던 참에 3‧15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 3‧15 선거가 세상이 다 아는 엉터리 선거지만 군대 안에서는 더 했다. 4‧19데모가 나자 군 안에서 하급 장교들이 군의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는 지휘관을 축출하려는 연판장을 돌렸다. 김종필 등 육사 8기생이 주축이 된 '하극상 사건'이다. 이때 박정희 소장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용단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가 한직으로 쫓겨났다. 4‧19가 5‧16로 발전하게 된 한 가지 단초이다.4월혁명 당시 군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3‧15 선거가 엉터리 선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엄령 후 동원된 사단장에서 일선 소대장까지 학생들을 향해 발포를 명령할 지휘관은 없었다. 설사 명령하더라도 사병들이 따라주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래서 엉거주춤하고 아주 이상야릇한 계엄군이 됐다.4월 19일에는 미사일 시험 발사 참관을 마치고 오후 2시쯤 서울로 돌아왔다. 광화문 네거리가 무법천지였다. 국방부에 갔다가 육군본부로 가니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신문이 불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보관의 지프를 얻어 타고 신문사에 갔더니 들어갈 수 없었다. 윤전기와 사옥은 나중에 다시 돈을 주고 사면 되지만 서울신문만이 갖고 있는 희귀 자료들이 없어진 것은 애석한 일이다.자유당 정권은 국민을 우습게 보았다. 경찰을 동원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을 해도 먹혀드니까 3‧15 선거에서 부정을 대대적으로 저지른 것이다. 여기에 제일 용감하게 저항한 것이 언론이다. 사설이나 칼럼을 통해 격렬하게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조선일보 최석채 논설위원이 쓴 사설이 그 예다.5. 참고자료최서영, 새로 보는 낡은 지도, 『관훈저널』 2007년 가을호관훈클럽 세미나, 4‧19혁명과 언론, 『관훈저널』 2010년 여름호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최서영(기자, 언론인)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9096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