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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각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최원각
-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김민철)
- 구술일자
- 2010년 10월 28일
- 구술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회의실
- 구술시간
- 1시간 45분 46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28년 출생 1949년 대구 영남일보 입사 1960년 당시 동아일보 계엄사령부 출입기자로 활동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동아일보 최고회의 출입기자 1961년 한일회담 진행 무렵 서울신문 주일특파원 활동
- 구술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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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1949년 대구의 영남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계에 입문했다. 6‧25전쟁 중에는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휴전협정 즈음에 동아일보로 옮긴 후 주로 국방부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4월혁명 기간 중 계엄사령부, 5‧16쿠데타 이후에는 최고회의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1961년 한일회담이 진행될 무렵 서울신문으로 옮겨 주일특파원으로 활동했다.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중 감군관련 기사(《동아일보》1958년 8월 10일, 「두 師團解體準備 20, 22師團 沈鬱한 空氣 속에」)를 게재해 일반이적죄 혐의로 헌병사령부에 긴급 구속되었다가 곧이어 구속 해제되었던 필화사건을 겪었다. 이것은 2개 사단을 해체한다는 군사기밀을 기사로 보도해 적을 이롭게 했다는 혐의였지만, 실제로는 원용덕을 중심으로 한 헌병총사령부의 실권이 약해진 상태에서 이를 만회하려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국가보안법 개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정권이 법 개정의 필요를 보여주는 모델케이스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았다.당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반공독재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반공을 통치 이슈로 삼으며 독재를 자행해 굉장한 실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유당 정권의 유지와 연장을 위해 3‧15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3‧15 선거 당시 국방부(후암동 소재)를 출입하면서 느꼈던 군내부의 분위기는 여당지지 일변도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노골적인 부정선거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여당지지의 분위기는 소위 정훈교육을 통해 이뤄졌는데, 그 당시의 군인 병사들이 대부분 농촌 출신이고 순박했기 때문에 이 정훈교육만으로도 큰 효과는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한편으로 개표 결과에 따라 사단장이 문책을 당할 수도 있는 시스템 즉 당시 소경무대라고 불렸던 이기붕에게 잘못 보이면 장성 진급이 어려운 상황은 특별한 지시 없이도 알아서 3‧15 선거에 임하게 했을 것이라 한다.3‧15 부정선거에 격분해 전국 각지에서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데모가 연일 발생하다가 4월 18일 서울 시내에서 고려대생들의 격렬한 데모와 이에 대한 정치깡패들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어 19일 서울 전역의 대학생 시위에 시민들까지 합세하며 시위는 더욱 확대되고 격해졌다. 이 데모대에 대한 경찰의 계속되는 발포(칼빈 총, 군대는 M1 소총으로 바꿨다고 함)는 데모 양상을 더욱 과격하게 변화시켰다. 이에 대해 정권은 폭도화한 데모대를 진압한다는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4월 19일 오후 1시 서울에 경비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5시에 서울을 포함한 5개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 선포되었다. 계엄사령관으로는 송요찬 참모총장이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크게 입김을 작용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병력 이동의 권한(작전권)은 마산사태 때 이양 받은 상태였고 주한유엔군총사령관 매그루더는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부사령관이 대신 결정했다고 한다.서울에 진주하게 된 계엄군인 15사단은 덕수궁, 서울운동장, 중앙청 3곳으로 나눠 주둔했다. 주둔 전, 사단장인 조재미 준장은 계엄사령관의 다음과 같은 방침을 부대원에게 지시했다. '첫째, 절대로 민간인 집에 들어가지 말 것. 둘째, 민간인에게 절대로 음식 기타를 얻어먹지 말 것. 세 번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쏘지 말 것. 그다음, 명령이 있기 전에 쏘는 자는 엄벌한다' 이 방침은 기본적으로 불발포 정책으로 이는 군내의 일반적인 분위기였고, 그러한 태도를 대표한 것이 송요찬 사령관이었다고 한다.당시 군내 장성급 인사까지도 쥐고 있던 서대문(이기붕)에 대해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던 송요찬 사령관의 개인적인 신념도 더한 유혈사태를 방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일의 상황을 정리해가는 과정에서 계엄군(송요찬 사령관)의 태도는 여당 중진, 서대문(이기붕)‧경무대(이승만)의 비서실 쪽에서 신속한 진압명령 등을 내려 즉각 사태를 수습하라는 요구가 잦았지만, 특별하게 폭력사태를 행한 경우만 조치를 취하는 태도를 보여 군이 중립을 지키면서 동시에 오히려 데모대를 어느 정도 커버했다는 느낌도 받았다고 한다.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시위가 4월 25일 교수단 데모 이후 폭발적으로 재발되었고, 경찰은 이 과정에서 데모대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화염병을 던지려 한다거나 탱크를 탈취하려한다는 보고를 계엄사령부에 전달했다. 이런 정보를 전해들은 계엄사령부는 심야 참모회의를 열고 데모대의 실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데모대로 꽉 차버린 시내로 계엄군이 진입할 수가 없어 실태 파악이 불가능하자, 당시 계엄사령부 출입기자로서 가까이 있었던(계엄사령관실 옆 방) 구술자를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시내 주요 위치에서 통신설비가 되어있는 차로 대기 중이었고, 동아일보 본사 편집국은 광화문 네거리가 잘 보이는 위치였기 때문에 시위대의 실태를 잘 알 수 있었다. 구술자는 이들과 송요찬 사령관의 직접 통화를 주선했다. 통화 후 송요찬 사령관은 데모대와 군이 전혀 충돌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는 것을 전해 듣고서는 경찰의 보고가 거짓이었음을 알고 경찰의 발포 요구도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송요찬 사령관이 (4월 26일 오전 9시경)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만나 국민들이 뭘 원하느냐는 질문에 이기붕의 사퇴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의견 등을 내놓자 그 이전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하야에 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다. 즉 송요찬 사령관이 하야를 직접 요청했다는 타 구술자의 증언이 맞을 것이라 했다. 이 진언을 수용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결정을 한 데에는 이미 민심이 돌아섰을 뿐 아니라 자유당과 이승만에 대한 실망이 최고조에 달했던 당시의 상황이(이승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전제함.)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한다. 한편 하야 결정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직접적인 압력이기보다는 완곡한 외교적 표현을 통해 그들의 의견을 전달했고, 하야 결정 직전에는 주한 미대사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하야 결정 후에 만났다고 한다. 즉 하야 결정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결국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을 유지하면서 국민에 대한 군의 발포가 전혀 없었던 것이 당시의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수 있도록 공헌했다고 보았다.4월혁명 이후 계엄사령부를 중심으로 군정을 하자는 일부 참모들 사이에서의 주장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송요찬 사령관의 입장은 '군은 중립을 지켜야 된다, 군은 본래의 임무 국방으로 돌아가야 된다.'였기 때문에 군정 주장이 무산되었을 것이라 했다.한편 이와는 다르게 4월혁명 이전에 김종필 등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하극상 사건(1960년 9월 24일)의 주모자로 수배 중이던 김종필을 자수하기 전날 만났는데, 이 (정군)운동과 관련해 기록을 남기자고 제의해 그 경과를 메모했다. 이 때 4월혁명 이전부터 김종필 등의 세력(5‧16 쿠데타 세력)에 의한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것은 (5월 5일로 예정되어있던) 송요찬 참모총장의 미국 방문 후 어느 시점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에 앞서 4월혁명이 발생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송요찬 장군 재임 중에 사회 각계각층의 숙정과 함께 군 자체의 숙정(1차 숙정)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이를 미비하게 여긴 김종필 등의 세력이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한일회담이 진행 중이던 때에 주일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본 우리 측 한일회담의 기본 목표는 일본과의 무역 확대와 일본 자본의 유입을 통한 국내 인프라 구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국내 상인들은 우리나라의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주기보다는 일본 자민당에 정치자금을 내고 청탁을 해 자민당 위원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직접 교섭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5. 참고자료『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길사, 1990『김정렬 회고록』, 김정렬, 을유문화사, 1993『한미관계20년사(1945~1965년)』, 도널드 스턴 맥도날드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1950년대반 옮김, 한울, 2001『4‧19혁명』, 김정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웅진, 2008『4월혁명통사』 10,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새로운 4‧19』, 안동일,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동아일보》‧《경향신문》‧《조선일보》‧《한국일보》《대한민국 관보》《東亞日報》 1960.5.2~8, 「4‧26市民革命 成功하기까지 戒嚴令下의 秘史(1)~(7)」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최원각(군인, 재판관)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2909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