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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유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홍영유
-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임대식, 이명숙)
- 구술일자
- 2010년 9월 30일
- 구술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구술시간
- 2시간 27분 38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40년 출생 1960년 당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으로 학보사 활동을 하며 4월혁명 참여, 4‧25교수단 시위 플래카드 제작 『기적과 환상』, 『4월혁명통사』1~10권 저자
- 구술내용 요약
-
1958년 홍영유는 고려대 법대에, 원종익은 고려대 농대에 입학했다. 원종익은 재학 중이던 1959년부터 고대신문사에서 재직했고, 홍영유는 다음해 2월 오주환 교수의 권유로 고대신문사에 입사했다. 4월혁명 당시 고대신문의 주간은 오주환 교수였으며, 원종익은 신문사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를, 홍영유는 고대신문 2면을 책임지는 기자로 활동했다.1960년 4월 18일 고대생 시위가 교내에서부터 시작되어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해 다음 날인 19일까지 계속했다. 고대생 시위대와 함께 시위 중 안암파출소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지만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파출소에서 탈출했다. 원종익 또한 신문기자로서 카메라 촬영을 진행하다가 경찰에게 카메라를 뺏기기도 했다. 이날 동대문 쪽에 있던 고대 시위대가 정치깡패로부터 폭행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4월 19일에도 학생 시위는 계속되었다.순식간에 전개된 4‧18과 4‧19를 겪은 후, 계엄령과 휴교령으로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원종익이 오주환 교수로부터 학교를 오라는 연락을 받고 구술자 등에게도 연락한 후 25일 고대신문사로 갔다. 휴교 상태라 일반 학생의 출입이 불가능했지만, 원종익은 고대신문 기자증이 있어 별 제지 없이 등교했다. 고대신문사에 도착한 원종익은 오주환 교수로부터 교수단의 시위가 곧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시위 때 쓸 플래카드 준비를 부탁받았다. 교수회의는 서울대 함춘원에서 있을 것이고, 플래카드에는 ‘재경각대학교수단’이라고 써서 가져 오라고 했다. 고대신문사 총무였던 원종익은 신문사 운영자금의 일부로 광장시장에서 광목을 구입했고, 주변의 페인트와 붓을 이용해 ‘在京各大學敎授團’이라고 쓴 후 접어서 회의가 진행 중이던 서울대 함춘원으로 갔다.이미 각 대학 교수들은 회의장에서 회의를 진행 중이었고, 이곳에서 구술자를 만나 플래카드를 넘겼다. 플래카드를 받아든 구술자는 주변에 조심스럽게 숨겨두고 회의장 주변을 배회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어느 노교수에게 플래카드를 전달한 후 다시 주변에서 멀찌감치 이 광경을 지켜봤다. 교수단은 플래카드에 각목을 붙이고, 임창순 교수가 ‘각대학교수단’이라고 적힌 플래카드 하단에 먹물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덧붙여 썼다. 이후 교수단은 열을 지어 서울대를 나서서 종로통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주변을 서성이던 구술자와 원종익은 시위대 말미를 따랐다. 원남동을 지나 종로로 접어들자 주변의 시민‧학생들이 호응하기 시작했고, 그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교수단은 을지로 입구에서 이동 경로를 바꾸어 미대사관 앞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했다. 시위 도중 처음에는 아무런 행위 없이 그냥 묵묵히 걸어만 가던 시위대가 종로를 지나면서 시민들의 호응이 있자,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또 미대사관 앞에서는 구호소리가 더욱 커졌다고 한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잠시 머문 후 교수단은 시위를 해산했다. 시위대 말미에 있었기 때문에 선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 수 없었고, 나중에 이항녕 교수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교수단 시위와 함께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는데, 교수단 해산 이후 광화문 쪽에서 탱크가 진입해 들어왔지만 오히려 시민들이 탱크 위에 올라서면서 탱크를 제지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시위에 홍영유와 원종익은 시위에 참가하기도 또 한 편 구경하기도 하면서 25일 늦은 시간까지 시내에 있다가 귀가하기 위해 명동파출소 앞을 지나던 중, 사복을 입은 경찰에 이끌려 명동파출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파출소 내에는 경찰들이 없었고 다른 곳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그러면서 사복경찰이 파출소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당시 시위대가 파출소 습격을 많이 했던 탓에 경찰들은 상당히 두려워했다. 부탁을 받은 홍영유와 원종익은 다음 날 아침까지 파출소를 지켜줬다. 귀가 후 늦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즉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구술자는 곧바로 4‧19혁명에 대한 기록을 위해 집필 작업에 몰두해 2달 후 안동일과 함께 홍기범이라는 필명으로 『기적과 환상』을 펴냈다.이후 구술자는 『사상계』와 《민주전선》 편집에 관여했다가 정부의 감시 등으로 도피생활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절필을 선언하고 생계에 매진하던 중 올해 2010년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4월혁명통사』 전 10권을 완간했다. 원종익은 학문에 매진해 대학 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홍영유의 친구라는 이유로 각종 감시를 받기도 했다.6. 성과와 한계4·25교수단 시위의 유일한 물품이었던 플랭카드의 제작과정과 플랭카드의 원래 명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원래 ‘재경각대학교수단’이라고 써 있었던 것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각목을 붙이는 과정에서 ‘재경’ 부분을 각목에 말아 붙여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기존에 고대신문반 학생들이 준비해왔다고만 알려져 있었고, 최근에 김현(당시 고대 국문과)이란 분의 증언과도 차이가 있는 부분이어서 향후 추가적인 확인 작업이 필요하겠다.7. 관련어3‧15부정선거, 4·18 고대생 시위, 4·19혁명, 4·25 교수단 시국선언, 4·25 교수단 데모, 4·25 교수단 시위, 교수단 플랭카드8. 참고자료《경향신문》 1962.4‧25, 「오늘 敎授‘데모’ 두 돌 經緯는 이렇다」《동아일보》 1963.4‧25, 「革命의 巨樹 이룬 겨자씨 한 알 (6)敎授 ‘데모’」《경향신문》 1964‧4‧25, 「敎授데모 秘話」『기적과 환상』, 안동일·홍기범, 서울영신문화사, 1960『民主革命의 발자취 : 全國各級學校 學生代表의 手記』, 李綱鉉 編, 正音社, 1960『사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3『역사비평』 1992년 가을호(통권 20호), 「나의 학문 나의 인생 4·25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임창순」, 이이화, 1992.8『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인, 2001.11『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8『4월혁명통사』,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4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홍영유(4.25교수단시위)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2784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