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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사건사고

해방정국의 혼란기 속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 통일정부 수립을 열망하는 국민들과 많은 지도자들의 노력을 외면한 채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부쳐 출범한 이승만 정권은 국가체제가 완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혼란과 무질서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치안이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수많은 정파가 난립하여 정국 주도권을 싸고 치열하게 경쟁했기 때문에 정치적 테러가 기승을 부렸다.
좌우 진영이 차탁과 반탁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45년 12월 30일, 우익 지도자인 한민당 당수 송진우가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요인에 대한 암살과 테러는 끊이지 않는다.
47년 7월 17일에는, 해방 직후부터 중도노선을 취하며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건국작업에 가장 먼저 착수한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라는 범인에게 암살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일에는 송진우, 김병로 등과 한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던 장덕수도 종로경찰서 경찰관에게 살해되는 등 요인에 대한 암살이 줄을 잇지만, 대부분의 사건이 그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유야무야 되어 버린다.
특히 49년 6월 26일에 발생한 백범 김구의 암살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의한 조직적인 암살사건이었기에 범인인 안두희의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 세기를 지나오다 의분을 느낀 시민의 집요한 추적 끝에 단죄를 받아야 하는 서글픈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가장 큰 사건은 역시 6.25 전쟁의 발발이다. 3년 동안 한 민족끼리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처절한 전쟁을 벌여 수백만의 무고한 민간인과 군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발생시켰다. 물적 피해도 천문학적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또 이승만은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수많은 정적과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다.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위협적인 득표를 하였고, 이에 부담을 느낀 이승만은 그에게 간첩죄의 누명을 씌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남도 제주를 휩쓸었다. 49년 남노당 조직원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의 3분의 1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 정부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와 같은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끊임없이 발생하여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