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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국민의 정부
김대중은 네 번째로 출마하는 1997년 대선에서 기필코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됐다. 김대중과 극우인 김종필이 연합해 대통령후보에 김대중을 밀되, 총리를 자민련에서 갖는 것을 포함해 각료를 두 당이 나누고, 2년 이내에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협약’이 맺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야당 후보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권이 평화적으로 교체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진보적 인사가 대통령이 된 점도 중시해야 할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극빈자?장애인을 배려하고,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했다.
IMF 사태는 재벌의 경제 지배를 수술할 절호의 기회였다. 김 대통령은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의 해소, 재무구조 개선, 재벌 간 업종 교환을 통한 업종전문화정책,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 제2금융권 경영지배 개선, 순환출자 및 부정내부거래 억제, 변칙 상속?증여 방지 등의 정책을 제시했다. 이 중 기업경영의 투명성 등 몇 가지는 효과를 보았으나 업종전문화정책 등은 실패작으로 평가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에도 각별히 역점을 두어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을 추진했다. 1990년을 전후해서부터 북쪽 출신의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도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1998년 6월, 정주영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지나 북녘 땅에 간 것은 세기의 이벤트였다. 금강산 관광은 정주영이 그 해 10월에 다시 소떼 501마리를 몰고 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남으로써 가시화됐다. 11월 18일 금강호가 관광객 889명을 태우고 동해항을 출발해 북의 장전항으로 항해했다.
금강산 관광은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2004년 4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6월 12-14일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엄청난 뉴스를 발표했다. 드디어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남의 극우반공세력의 방해책동도 대단했지만, 북도 의구심을 갖고 대했고, 미국의 부시 정권도 못마땅해 했다. 1999년 6월에 있었던 서해교전은 햇볕정책을 수장시킬 뻔했으나, 김 대통령은 인내심을 갖고 대북접근을 추진했다. 예정보다 하루 늦은 6월 13일 김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영접을 나왔다. 남쪽 TV 화면에 비친 북 지도자의 재치있고 활달한 모습은 반공교육을 받은 남의 주민들에게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장시간 정상회담을 가졌고, 15일 자주적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역사적인 대사건인 남북정상회담이 있고나서 남북관계는 급진전됐다. 8월과 11월, 12월에 이산가족 방문단을 교환했고, 9월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갔으며, 경의선 개통 기공식이 있었다. 그 해 12월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IMF 사태는 재벌의 경제 지배를 수술할 절호의 기회였다. 김 대통령은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의 해소, 재무구조 개선, 재벌 간 업종 교환을 통한 업종전문화정책,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 제2금융권 경영지배 개선, 순환출자 및 부정내부거래 억제, 변칙 상속?증여 방지 등의 정책을 제시했다. 이 중 기업경영의 투명성 등 몇 가지는 효과를 보았으나 업종전문화정책 등은 실패작으로 평가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에도 각별히 역점을 두어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을 추진했다. 1990년을 전후해서부터 북쪽 출신의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도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1998년 6월, 정주영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지나 북녘 땅에 간 것은 세기의 이벤트였다. 금강산 관광은 정주영이 그 해 10월에 다시 소떼 501마리를 몰고 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남으로써 가시화됐다. 11월 18일 금강호가 관광객 889명을 태우고 동해항을 출발해 북의 장전항으로 항해했다.
금강산 관광은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2004년 4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6월 12-14일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엄청난 뉴스를 발표했다. 드디어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남의 극우반공세력의 방해책동도 대단했지만, 북도 의구심을 갖고 대했고, 미국의 부시 정권도 못마땅해 했다. 1999년 6월에 있었던 서해교전은 햇볕정책을 수장시킬 뻔했으나, 김 대통령은 인내심을 갖고 대북접근을 추진했다. 예정보다 하루 늦은 6월 13일 김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영접을 나왔다. 남쪽 TV 화면에 비친 북 지도자의 재치있고 활달한 모습은 반공교육을 받은 남의 주민들에게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장시간 정상회담을 가졌고, 15일 자주적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역사적인 대사건인 남북정상회담이 있고나서 남북관계는 급진전됐다. 8월과 11월, 12월에 이산가족 방문단을 교환했고, 9월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갔으며, 경의선 개통 기공식이 있었다. 그 해 12월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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