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콘텐츠 8건
더 보기-
페퍼포그 연기 자욱했던 오월 속으로_ 5.3인천민주항쟁
요약설명 : 수가 없었다. 시위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경찰들의 강경 진압에 수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자 언니도 그날 경찰에 잡혀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말도 마.” 명자 언니는 그날을 생각하며 진저리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좁은 유치장에 사람들을 빽빽이 갇혀놓고 무자비하게 다루었어. 남자들은 몽둥이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여자들은 속옷 차림으로 쪼그려뛰기도 시키면서 자기네들끼리 시시덕거렸지. 게 중에는 나중에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으로 유명한 문귀동이란 자도 있었어.” 그날 이후 기다렸다는 듯 특별 검거령과 함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정보·수사·대공 합동...
-
철통같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부마민주항쟁
요약설명 : 양상으로 변해갔다. 고교생까지 포함하여 청년, 시민들이 연행되었지만 한번 댕긴 불길이 번지듯 시위대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이미 시위는 학생들 차원에서 벗어나 시민항쟁의 양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10월 17일 날이 밝자 시위는 계속되었다. 분노한 민중들은 파출소, 경찰서는 물론 정권의 외곽 노릇을 했던 KBS와 MBC, 부산일보, 경남도청, 중부세무서 등을 습격하고, 경찰차와 방송국 차를 불태웠다. 거리거리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 퍼졌고, 애국가가 수도 없이 불렸다. 1972년 유신체제 이후 가장 극렬하고 가장 큰 규모의 항쟁이었다. 유신의 끝자락이었던 1979년은 그렇지 않아도...
-
5·18민주화운동과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요약설명 : 구성했으며 도청에 모여 결의사항을 발표했다. “계엄군은 시내 진입을 하지 말라.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살상에 대한 시민들의 정당행위이므로 공수단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구속학생들을 석방하라. 그동안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쳐라.” 계엄사는 재야수습대책위원회의 어떠한 요구 조건도 들어주지 않았다.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학생과 청년수습대책위가 주관하여 회의를 개최했고 조아라는 YWCA 회장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석했다. 무기 회수냐 항전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26일 오후 6시경 조아라, 이애신, 윤공희 대주교 등 민주인사들과 정상용, 김종배, 김창길 등을 비롯한 여러...
구술 컬렉션 7건
더 보기-
구양술
면담자 : 양라윤
일자/장소: 2010년 7월 14일/광주 호남매일신문사
요약설명 : 9시 40분경,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를 에워싸자 경찰서 쪽에서 갑자기 헤드라이트...
-
정우화
면담자 : 양라윤
일자/장소: 2010년 7월 3일/광주 4‧19민주혁명기념관
요약설명 : 시위대가 경찰서를 공격하자, 경찰서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시위 군중을 향해...
-
윤승웅
면담자 : 양라윤
일자/장소: 2010년 11월 13일/광주 구술자의 자택
요약설명 : 구술자는 경찰서 내부에 걸려있던 태극기를 밖으로 떼어와 시위대들을 박수를 받기도 ...
일지사료 14건
더 보기-
광주시 민주당원들의 ‘민주주의 장송’시가행진
일자 : 1960.3.15
분류 : 시위 상황 > 광주
요약설명 : 것을 이에 성명한다.출처 : 『동아일보』1960. 3. 16 조1면일련의 충돌 사태가 있었던 광주거리는 투표가 끝난 뒤에도 무장경관의 삼엄한 경비에 놓였다. 오후 2시 장송시위 뒤부터 민주당 광주시당부 부근에는 수 백 명의 시민들이 저녁 늦게까지 떠나지 않았다. 정·사복경관들은 시민의 통행을 제한하고 특별 감시를 계속하였다. 이날 밤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서석국민학교 주위와 경찰서 근방 에도 첩첩이 둘러싼 정사복 무장경찰대가 감시하고 있었다. 특히 개표장 옆에는 낮에 장송시위에 동원되었던 2대의 소방차가 다시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심야에 이르기까지 광주 시내 거리의 순찰이 계속되었다.『동아일보』1960. 3. 16 석2면....
-
통금도 아랑곳 없이 광주학생의 피는 끓고 있다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광주
요약설명 : 옮겨졌으나 숨졌다. 강정섭의 신원은 4월8일에 가서야 밝혀졌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30년사 편찬위원회, 173·190쪽). 오후 8시 30분 경, 시위대는 학동파출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어 양림동파출소를 습격하였다. 양림동파출소를 파괴한 다음 시위대는 둘로 나뉘어져 일대는 서방지서로 향하다가 흩어지고 다른 일대는 도심지로 되돌아와서 도청 앞을 거쳐 호남신문사 앞길로 머리를 돌렸다. 다른 시위대열 또한 충장로와 금남로 부근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계림동파출소를 습격하고 금남로를 통과하여 특무대 앞에 이른 시위대열과 조우하였다. 어디선가 “특무대를 부수자”는 소리가 나오자...
-
계엄선포에도 불구, 시위 더욱 가열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광주
요약설명 : 터지도록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원들은 계엄령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스크럼을 짜고 “역적의 공산당을 잡으러 가자!”하고 멸공가를 부르짖으면서 제지하는 경찰관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때 담양, 장성 등의 인근 경찰서에서 응원부대가 와 훨씬 강세된 경찰병력은 콩 튀듯이 공포를 쏘았다. 시위대는 투석으로 대항하면서 일진일퇴하였다. 금남로 법원 앞에서 경찰대와 충돌한 시위대는 경찰관과 맞붙어서 여학생들이 날라다주는 돌멩이로 싸웠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인해 학생 여러 명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끌려간 학생들은 사복형사들에게 몰매를 맞았다.『전남일보』196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