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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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의 노래-어느 구두닦이의 혼을 대신하여-
등록번호 : 00027516
날짜 : 1980.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윤영규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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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화 1985년 3월호 창간호
등록번호 : 00171594
날짜 : 1985.03.00
구분 : 문서류 > 정간물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닦아내는 구두닦이 민속기행: 보성 문덕면 씻김굿 창립총회보고. 각분과 논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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救國鄕軍報 第五號
등록번호 : 00859958
날짜 : 1976.12.20
구분 : 문서류 > 정간물
기증자 : 박문규
요약설명 : 통일을 위한 민족교육, 한국 새마을 운동에 대한 보고, 구두닦이 소년들의 처참한...
사진사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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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시 총격으로 사망한 구두닦이 오성원의 묘]
등록번호 : 00578042
날짜 : 미상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3.15의거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사진메모 : 마산시 합성동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흔적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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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인상 요구 문구를 보고 있는 구두닦이 소년
등록번호 : 00710587
날짜 : 1964.01.15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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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청소년이 되겠다" 는 선서하는 명동의 구두닦이들
등록번호 : 00729646
날짜 : 1967.09.14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사료 콘텐츠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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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같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부마민주항쟁
요약설명 : 동아대를 비롯한 대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일용직 청년 노동자, 식당 종업원, 심지어는 때밀이와 구두닦이 청년들까지 가세하여 삽시간에 불어났다. 인근 시민들은 박수를 쳤고, 물을 비롯하여 음료수를 내어놓기도 했다. 밤이 되자 시위가 잦아지기는커녕 더욱 불어갔고 과격한 양상으로 변해갔다. 고교생까지 포함하여 청년, 시민들이 연행되었지만 한번 댕긴 불길이 번지듯 시위대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이미 시위는 학생들 차원에서 벗어나 시민항쟁의 양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10월 17일 날이 밝자 시위는 계속되었다. 분노한 민중들은 파출소, 경찰서는 물론 정권의 외곽 노릇을 했던 KBS와 MBC, 부산일보, 경남도청, 중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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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 4.25교수단시위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까지
요약설명 : 중에는 실업자나 구두닦이 등 기층민중들이 다수 참여했다. 서울대 이희승, 연세대 정석해 등의 교수들이 비밀리에 모여 학생들의 피에 행동으로 답할 것을 결의했다. 각 대학 258명의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교수단 시위에는 학생들도 스승의 행렬에 뒤따랐다. 거리에 나서자 수많은 학생, 시민이 시위행렬에 동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대열이 불어나는 만큼 기세도 올랐다. 시위대가 이기붕의 집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집안으로부터 실탄 사격이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실탄을 쏘며 시위대을 위협하던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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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 - 허병섭 목사
요약설명 : 그 바닥에서 구두닦이들의 대부가 되었고 은성학원이라는 조직까지 만들어 어렵게 살아가는 구두닦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훗날 ‘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은 허병섭 목사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청계천 꼬방동네로 불리는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1974년 5월31일 당시 동대문구 신설동 노벨극장 뒤에 진을 치고 있던 판자촌은 온갖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들어 하루살이 같은 삶은 이어가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여느 판자촌하고는 달리 창녀, 기둥서방, 넝마주이, 깡패 등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까지 받은 그가 입대한 뒤 휴가를 나올 때마다 친구인 이규상...
구술 컬렉션 1건
더 보기일지사료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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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청 앞 격전과 시위대의 해산
일자 : 1960.3.15
분류 : 시위 상황 > 마산
요약설명 : 온 귀환동포와 품팔이 부두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홍등가의 여성들이 주로 거주하였는데, 이들도 시위에 적극 합류하였다.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7. 305-306쪽 시위대는 “이것이 공명선거인가? ”하고,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경찰은 이미 시위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경비망을 폈다. 창원, 진해, 함안, 김해, 고성등 인근 경찰서로부터 지원병력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는 도경 진압부대 150~200여 명도 도착했다. 경찰은 공격태세로 전환하여 소방차로 물을 뿌리는 한편 최루탄을 발사하고 소총도 쏘았다. 시위대는 돌, 막대기, 쇠조각, 유리병 등으로 맞섰으나 경찰의 실탄 난사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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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 약 20명 추산
일자 : 1960.4.25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4. 26 석3면4월 25일 동아일보가 확인한 부상자 명단적십자 병원 •최종우(19, 배제고, 행촌동 4가 45) •이강열(24, 공업, 냉천동 4-1) •민광호(24, 회사원, 대현동) •박근성(21, 직공, 냉천동 79-3) •김승동(13, 정동 16) •이혜춘(23, 영등포구 당산동29) •김광길(19, 오산고 도원동 11) •하석현(남대문시장 2층 내 고학생) 이상 8명 메디칼센터 •조경환(17, 구두닦이, 서소문동 75) 이상 1명 대학병원 •박찬화(18, 대동상고 2년, 중상)‘박찬화(18, 대동상고 2년, 중상)’는 조선일보가 발표한 동대문 앞 부상자 명단 중 ‘박찬하(18, 남, 대동상고 3년)’와 동일인으로 보인다.•박상헌(20, 강릉농고 3년, 강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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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부터의 원정시위로 감격과 불안의 쌍곡선
일자 : 1960.4.26
분류 : 시위 상황 > 마산
요약설명 : 들이닥쳐 혼란 가운데 무방비사태에 빠지게 되었다.일부 기록에서는 이들이 대부분 “주먹을 쓰는 깡패, 건달, 양아치, 구두닦이, 행상인이 태반이었으며, 이밖에도 홍등 가의 여인, 품팔이, 노동자도 더러 끼어 있었다”고 한다(3·15의거 기념사업회, 『3·15의거사』, 2004, 425쪽).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원정시위대의 수를 1천 명으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26일 부산일대를 휩쓸던 이들은 오후 3시 경 트럭, 버스, 택시, 지프차 등 50여대의 차량을 몰고 마산으로 향하였다.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들이 타고온 차량의 수를 23대로, 이들이 마산에도 착한 시각을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