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42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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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열사 청계천기념사업 추진위원회-결성식 자료집
등록번호 : 00886572
날짜 : 2003.07.16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주요 경과 -추진위 사업 내용 -전태일열사 청계천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결성선언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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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판자촌 빈민선교 보고
등록번호 : 00102806
날짜 : 1974.09.06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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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도 청계천 제2지구를 중심한 목회 보고서
등록번호 : 00875867
날짜 : 1975.01.2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청계천뚝방교회에서 청계천 제2지구를 중심으로 빈민들의 실태등을 조사한 내용.
사진사료 26건
더 보기민주화운동사 컬렉션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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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요약설명 :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민생, 민권, 민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민중 민족 민주선언>은 원본이 아니라 독일에서 발간된 신문에 결의문이 생략된 채 부분 개제된 것이다. 1973년 4월 3일 이화여자대학교 명의의 <선언문>(등록번호 : 480506)은 “오늘 오후 2시, 우리 이화인은 서울시내 전 대학생이 모이는 시청앞 광장과 청계천 5가 네거리에 집결한다”라고 행동사항을 밝혀 민청학련의 통일된 행동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74년 3월 21일 경북대학교의 <反獨裁民主救國宣言>(등록번호 : 440716) 역시 원본이 아니라 일어로 번역된 요약본만이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 민청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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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피복노동조합결성투쟁
요약설명 : 청계피복노조와 관련하여 366건이 소장되어 있다. 청계천 일대 평화시장 등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피복업계 노동자들의 임금실태 보고서 <시장상가 피복제품업체 근로자의 임금실태 조사결과> (등록번호 : 512069), 윤보선, 함석헌 등 15인의 사회 각계 인사들이 청계피복노조 탄압에 항의하여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록번호 : 528466), 1981년 서울시의 청계노조 해산명령에 대하여 명령철회를 요구하며 발표한 <성명서> (등록번호 : 333357), 전태일 죽음 이전부터 청계노조 20주년의 역사를 기록한 <청계노조 20년 투쟁사> (등록번호 : 441463), 1984년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여 정상화시킬 것임을 주장한...
사료 콘텐츠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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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 - 허병섭 목사
요약설명 : 이어오다 청계천 판자촌까지 흘러들었던 이철용은 그 바닥에서 구두닦이들의 대부가 되었고 은성학원이라는 조직까지 만들어 어렵게 살아가는 구두닦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훗날 ‘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은 허병섭 목사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청계천 꼬방동네로 불리는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1974년 5월31일 당시 동대문구 신설동 노벨극장 뒤에 진을 치고 있던 판자촌은 온갖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들어 하루살이 같은 삶은 이어가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여느 판자촌하고는 달리 창녀, 기둥서방, 넝마주이, 깡패 등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까지 받은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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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영혼, 조영래 변호사
요약설명 : 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전태일의 죽음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스물두 살의 재단사 전태일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그는 불길 속에서 쉼 없이 외쳐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숯처럼 까맣게 된 전태일은 목숨이 꺼져 가는 순간에도 한 손에 근로기준법 책자를 쥐고 있었다. 빈소로 찾아간 조영래는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보며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국 사회에 노동자의 존엄한 권리문제를 근본적으로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영래의 삶의 행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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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생애를 바꾼 세 친구
요약설명 : 교정에 가득 찬 수백 개의 깃발들과 만장들마저 흐느끼게 했다. 영결식 이후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문익환은 학생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과 함께 했다. 문익환의 가슴속에는 수많은 송몽규와 윤동주가 넘실거렸다. 수많은 장준하와 전태일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걸었으며, 숱한 박종철과 이한열이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광화문과 시청, 을지로와 청계천을 함께 걸으며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쳤다. 무수히 많은 친구들과의 거대한 연대와 행진은 결국 1987년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고, 마침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구술 컬렉션 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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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일
면담자 : 이가연
일자/장소: (1차) 2023.7.25. (2차) 2023. 7.26. / 인천
요약설명 : 이후 청계천으로 이주해 노점상을 하였다. 노점을 하면서 우연히 교회를 나가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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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면담자 : 김성훈
일자/장소: 2005.11.21./두레교회 목회실
요약설명 : 청계천의 활동과 만난사람들, 70년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청계천 사람들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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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섭
면담자 : 김성훈
일자/장소: 2005.10.18./무주군 진도리 만나공부방
요약설명 : 활동, 청계천 활동과 목요기도회, CO조직운동의 시작과 신설동, 유신반대투쟁과 ...
일지사료 1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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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교하는 시위대에 깡패 습격
일자 : 1960.4.18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시위대의 선두가 내무부 앞과 을지로4가에 이르렀을 때 선도차는 웬일인지 을지로통으로 계속 나가지 않고 청계천을 거쳐 유난히 복잡한 종로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조화영 편, 80쪽뒤따르던 시위 행렬도 자연스레 이를 따라 종로 쪽으로 나아갔다. 오후 7시 20분경, 어느새 주위가 많이 어둑해졌다. 시위대가 예지동 천일백화점 앞에 다다르는 순간 갑자기 양편 길가에서 100여 명의 괴한들이 벽돌과 부삽, 몽둥이, 쇠뭉치, 갈고리 등을들고 뛰어나와 선두 학생들을 마구 난타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19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70쪽. 깡패의 수를 60-70명으로 기록한 자료도 있다(이효식, 「4·19에서 4·26까지의 서울」, 이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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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국타개 학생 총궐기대회 선언문 기초 혐의로 한학련 간부 2명 연행
일자 : 1964.5.2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지난 25일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의 선언문을 기초했다는 혐의로 한국학생총연합회 사무국원 박상원(27 고대 정경대학원)과 손진영(26 제9차 국제학생총회 한국대표) 등 2명이 26일 하오 한학련 연락장소이던 청계천2가 모처에서 사복차림의 수사기관원에 의해 연행되었다. 또한 27일 상오 8시 15분경에는 고대 총학생회장 구자신이 자기 집에서 시경에서 왔다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갔다. 이들 3명은 27일 하오 모두 석방되었다.『경향신문』 1964.5.27 석3면, 『동아일보』 1964.5.27 석7면, 『동아일보』 1964.5.28 석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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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 대규모 시위, 고려대·서울대 등 약 3,000명
일자 : 1964.6.2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500명(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87쪽)으로 다르게 쓰고 있음이 집결, 청계천2가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여 “박정희는 즉시 하야하고 여야 협조하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시위대 수가 차츰 불어나자 200명가량을 돌연 나타난 사복경찰들이 마구 잡아 차에 싣고 갔다. 이날 시위에서 경찰의 일제 반격전으로 김영모(경영 1년), 신정일(농경3년) 등 5~6명은 곤봉으로 머리 등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조완(16, 신설동) 군은 최루탄에 맞아 귀를 다치는 등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서울상대 2일, 약 400명의 서울대 상대생들은 상오 11시 15분부터 교내에서 ‘매판세력성토대회’를 열고 “매판세력타도”를...